대통령 중심제인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 선거는 정치인과 정당의 이합집산이 일어나는 중요 계기가 된다. 국민신당도 1997년 10월 10일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급조되었다.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한 이인제를 중심으로 창당하였다. 1997년 7월 21일 열린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서 이회창 후보가 1만 1544표로 전체 유효 투표의 60%를 얻어, 4,622표로 40%를 획득한 이인제 후보를 물리쳤다.
신한국당 경선은 집권 여당의 첫 자유 경선이라는 데 의의가 있었다. 그렇지만 당의 대의원에게만 투표권이 부여되고, 일반 국민의 참여는 원천 봉쇄되었다. 당시 이인제 경기도지사는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높은 지지 여론에도 불구하고 경선 결선에서 패배하였다.
경선에서 승리한 이회창 후보가 아들 병역 문제 의혹을 계기로 지지도가 급격히 떨어지자 탈당하여 독자 출마를 선언하였다. 이인제는 경선 불복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명예혁명을 완수해 국민 정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소명감을 내세웠다.
세대 교체만이 30년의 낡고 병든 ‘3김 정치’ 구조를 청산하고, 깨끗하고 신뢰받는 생산적인 정치의 틀을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신한국당의 민주계와 민정계 일부 정치인들이 동반 탈당하였다.
신한국당 경선 때부터 이인제를 지지했던 지구당 위원장 13명이 9월 26일 탈당하였다. 10월 31일에는 김운환, 한이헌 의원이, 11월 3일에는 이만섭, 박범진, 이용삼, 김학원, 원유철 의원 등이 이인제 진영에 합류하였다. 창당하면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총재로, 이인제를 대통령 후보로 뽑았다.
국민신당이 창당되자 신한국당과 국민회의는 김영삼 대통령의 청와대가 개입해서 조직과 자금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이인제의 대선 출마로 여권 출신 후보가 두 명이 나와서 범여권 유권자가 분열되었다.
제15대 대선에서 국민신당의 이인제 후보는 492만 5591표[득표율 19.2%]를 얻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 1032만 6275표[40.3%],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993만 5718[38.7%]에 이어 3위로 낙선하였다. 이인제 후보의 대선 패배 이후 국민신당은 1998년 9월 28일 새정치국민회의와 합당하였다. 국민신당 일부는 자유민주연합에 개별 입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