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

정치
인물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46년 9월 1일
사망 연도
2009년 5월 23일
본관
광주(光州)
출생지
경상남도 김해
주요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운명이다|노무현이 만난 링컨
주요 경력
제16대 대통령
대표 상훈
영국 바스 대십자훈장(2004)|무궁화대훈장(2008)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노무현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다.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다가 정계에 입문하여 제13대, 제15대 국회의원직, 김대중 정부에서 제6대 해양수산부 장관직을 지냈다. 대통령 취임 후 '참여정부'로 명명하고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를 추구하였다. 한·미 FTA와 이라크 파병 등 국익 중심 외교통상 정책을 펼쳤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었다.

정의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가계 및 인적 사항

노무현(盧武鉉)은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1946년 9월 1일 아버지 노판석(19001976)과 어머니 이순례(19141998) 사이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1973년 권양숙(權良淑)과 결혼하여 아들 노건호(1973~)와 딸 노정연(1975~)을 두었다. 1966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1년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하였다. 독학으로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1977년 사법연수원을 7기로 수료하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하다가 1978년 사직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하였다. 1981년 변론을 맡게 된 부림사건(釜林事件)을 계기로 인권변호사로 활약하였다.

주요 활동

노무현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2003년 2월 25일부터 2008년 2월 24일까지 재임하였다. 13대 · 15대 국회의원, 2000~2001년 제6대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하였다(2000-2001).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공천을 받아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었다. 초선의원임에도 불구하고 TV로 생중계된 제5공화국 청문회에서 전직 대통령 전두환,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에게 준엄하게 질의하는 모습이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그러나 1990년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총재 노태우)과 야당인 통일민주당(총재 김영삼), 신민주공화당(총재 김종필) 3당 합당을 ‘야합’이라 반대하며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에 입당하여 대변인과 부총재를 지냈다.

1992년 3월 24일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동구에 다시 출마하였지만, 재선에 실패하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하였지만 역시 낙선하였다(득표율 37.58%). 1996년 4월 11일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였으나, 여당인 신한국당 이명박(41.00%),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 이종찬(33.55%)에 밀려 3위로 낙선하였다(17.66%).

이후 ‘국민통합추진회의’를 결성하였으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부총재로서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7월 실시된 종로구 보궐선거에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하였지만, 2년 뒤인 2000년 4월 13일 치러진 16대 총선에 다시 부산에서 출마하였다. 보좌관과 가족을 비롯하여 그를 아끼는 후원자들이 강력하게 반대하였지만,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도전으로 부산에서 다시 출마하였으나, 또다시 낙선하였다.

그렇지만 수차례에 걸친 지역주의 타파 노력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한국 최초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자발적인 정치인 팬클럽이 생겼다.

제16대 대통령선거

2002년 12월 19일에 치러질 제16대 대통령선거 당내 경선에 참여하였다.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는 이인제 · 노무현 · 김근태 · 정동영 · 한화갑 · 김중권 · 유종근 등 모두 일곱 명이 등록하였다. 경선 투표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인제 후보 대세론이 우세하였다. 노무현 후보는 영남 출신으로 호남을 배경으로 한 민주당 주류와 거리가 멀었지만, ‘국민경선’이라는 제도적 틀을 통해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국민경선제’는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과 국민(50%)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같은 해 3월 16일 광주광역시 경선 승리를 기점으로 지역주의 투표 성향을 무너뜨리면서 ‘노풍(盧風, 노무현 바람)’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후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하였고,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공식 선출되었다. 16대 대통령선거에서 70.8%의 투표율 중 노무현 후보가 48.9%를 얻어 46.6%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2.3%, 57만여 표 차이로 근소하게 꺾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참여정부 출범

‘참여정부’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노무현 정부의 캐치프레이즈는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였다. 참여정부는 국무회의를 토론식으로 진행하였다. 국가권력은 반드시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과거사 정리에도 적용하였으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를 출범시켰다.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제주 4 · 3사건에 대해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하였다. 과거사 정리를 위한 10개 법을 제정하고 10개 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 규명 및 명예 회복, 보상 등의 활동을 벌였다.

국가정보원, 경찰, 국방부는 자체적으로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설치하여 독재정권하의 인권 침해에 대한 청산 작업을 진행하였다. 2004년 3월 9일 정치자금법, 선거법, 정당법 등 정치 관계법 개정안이 처리되었다. 이로써 한국 정치에서 고질적인 정경유착(政經癒着)의 고리를 대부분 제거하였다.

참여정부는 첫째, 튼튼하고 안정적인 경제 운용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켰다. 둘째, 종래의 성장 지상주의를 버리고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을 추진하였다. 셋째, 인위적인 경기부양(景氣浮揚)을 멀리하고 원칙 있는 경제를 운용하였다.

참여정부는 기본적으로 개혁 · 개방과 성장을 지향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약자들이 사회적으로 도태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다. 참여정부는 사회통합을 그 자체로 중요하게 보았을 뿐 아니라, 경제 성장과 개방을 촉진하는 상보적 관계로 파악하였다. 광범위한 사회보험 사각지대를 메우려 노력하고, ‘희망사회 투자계획’이란 이름의 빈곤 아동 · 청소년 종합 대책과 근로장려세제(EITC)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임기 중 경제성장률은 4.42%로 OECD 평균성장률을 상회하였다.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액이 2만 1천 달러를 돌파해 5년 만에 국민소득을 2배로 끌어올렸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사상 첫 주가지수 2천 시대 개막, 사상 첫 수출 3천억 달러 돌파도 이루었다. 물가상승을 반영한 실질임금 증가율도 참여정부 기간 5년 연평균 3.6%씩 상승하였다.

최저임금도 연평균 10.6%씩 상승하였다. 복지예산 확대 폭도 대폭 늘였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의 복지지출 비중은 출범 첫해 5%에서 마지막 해 9%로 증가하였다. 복지를 포함한 사회적 투자는 매년 22%씩 증가하였다. 기초노령연금제도는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복지 정책이다.

집권 초기 노무현은 집권당 분당이란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였다. 이후 2004년 3월 12일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 직무를 정지당하였다. 그런데 탄핵을 주도하였던 한나라당자유민주연합 그리고 새천년민주당은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였다. 17대 총선 결과 헌정 사상 최초로 개혁 진영이 의회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같은 해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소추안을 기각하며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등 지방 균형 발전을 추진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로 수도를 이전하는 계획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아 행정도시로 선회하였다. 권위주의와 정경유착을 타파하고 각종 재벌 개혁을 시행하였다.

상속증여세의 포괄주의를 도입해 대기업 총수의 탈세 여지를 좁혔다.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를 시행하고, 대기업 간 불공정 담합에 대한 적발과 처벌을 강화하였다. 한미 FTA 추진과 이라크 파병 등 국익 중심의 외교통상 정책을 펼쳤다.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었다.

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퇴임 후 서울이 아닌 고향으로 돌아갔다. 귀향 후 전임 대통령 같지 않은 소탈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시민들과 어울렸다. 그러던 중 친인척 비리로 인해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2009년 5월 23일 집 근처인 김해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4년 영국 최고 훈장 바스 대십자훈장(GCB: 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ath), 폴란드 흰독수리 훈장, 2005년 미국 조지 부시 전 대통령 ‘밴 플리트’ 등을 수상하였다. 이어 2007년 카타르 독립대훈장과 스페인 시민 훈장을 받았고, 덴마크 코끼리 기사에 수훈되었다. 2008년에는 무궁화대훈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단행본

강원택·장덕진 엮음, 『노무현 정부의 실험: 미완의 개혁』(한울, 2011)
노무현재단, 『운명이다: 노무현 자서전』(유시민 정리, 돌베개, 2010)
이정우 외, 『노무현이 꿈꾼 나라』(동녘, 2010)
노무현, 『성공과 좌절: 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학고재, 2009)
이백만, 『불멸의 희망: 노무현의 가치, 노무현의 정책』(21세기북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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