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민주당 ()

목차
정치
단체
1987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목차
정의
1987년에 창당되었던 정당.
내용

12대 국회에서 제1야당이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에 대한 당외의 김영삼(金泳三)과 김대중(金大中)의 영향력 행사가 당총재 이민우(李敏雨)의 반발로 뜻대로 되지 않자, 두 사람은 그러한 상태의 신한민주당으로는 민주화 및 대통령직선제개헌 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없다고 판단, 자기들의 지지세력들을 탈당시켜 새로운 야당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창당대회에서 채택된 정책에 따르면, 이 당의 기본 목표는 남북통일의 우선적 추진, 대통령직선제개헌 관철, 의회민주주의의 수호, 폭압과 착취로부터의 국민해방, 부의 공정한 분배실시 등이다. 총재에는 김영삼이 선출되었으며, 김대중은 정치활동금지가 해제되지 않아 당원으로 입당하지 못하였다.

이 당은 최종적으로 69명의 국회의원을 확보, 제1야당이 되었다. 통일민주당은 창당과 동시에 대통령직선제개헌 관철을 위하여 신한민주당 때보다 더욱 강경하게 투쟁하였다.

개헌논의의 중지를 선언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4·13조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5월 27일 비제도권의 반정부 내지 반체제운동단체들과 합동하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 대통령직선제개헌 관철을 위한 집회·시위 등 장외투쟁을 강화하였다.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와 합동으로 ‘박종철(朴鍾哲)군고문살인은폐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를 개최, 전국적으로 집회와 시위를 유발하였으며, 6월 26일 ‘민주헌법쟁취국민평화대행진’을 벌여 전국적인 시위를 유발하였다.

이와 같은 통일민주당과 비제도권단체들이 합동으로 전개 한 장외투쟁의 결과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대표이자 대통령후보인 노태우(盧泰愚)를 통하여 6·29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결과, 통일민주당의 주장대로 헌법은 대통령직선제로 개정되었고, 김대중은 공민권이 복권되어 정치활동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투옥되었던 반정부·반체제 인사들은 대거 석방되었다.

이러한 승리를 거둔 통일민주당은 대통령선거에 나설 후보자선출문제를 놓고 대립하다가 김대중계가 10월 29일 집단탈당하여 평화민주당(平和民主黨)을 결성함으로써 분당되었다.

이에 통일민주당은 김영삼을 대통령후보로 선출하고, 1987년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참여하였으나, 유효투표에 28.0%를 획득, 36.6%를 획득한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5개월 후에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쳐 총 59석을 확보, 125석을 확보한 민주정의당과 70석을 확보한 평화민주당에 이어 제3당이 되었다.

통일민주당은 제13대 국회 개원 이후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종필(金鍾泌)의 신민주공화당(新民主共和黨)과 공조체제를 구축, 소수의석을 가진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을 무력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1989년 말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통합논의가 이루어져 합의가 되자 당 총재인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인은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정식으로 선언하였다. 이에 통일민주당은 1월 30일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당의 해체를 결의하고 소속정치인들은 3당이 합당하여 만든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정당사』 3(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92)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