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김대중은 낙선 직후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정권은퇴 선언 후 정치활동을 중단하였던 김대중(金大中)은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약칭:아태재단)을 조직하고 이 조직을 기반으로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 나갔다.
정계은퇴 선언 후 민주당을 측면 지원해오던 김대중은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조순(趙淳)을 비롯한 민주당의 지방선거 후보자들을 적극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정치활동을 사실상 재개하였다.
이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서울시장을 차지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김대중은 그러한 승리를 자기의 정계복귀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로 받아들여,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승리가 확인된 직후 정계복귀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김대중의 정계복귀는 당시 당내 기득권을 가진 이기택(李基澤) 등 민주당의 비김대중계 당원들의 반발을 샀으며, 그들은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저지하기 위한 강경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비김대중계 당원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 김대중은 1995년 7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할 것을 선언하였다.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국민들의 열망에 힘을 얻은 김대중은 민주당 내의 자기 추종세력과 아태재단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신당창당을 추진하여 1995년 9월 5일 새정치국민회의(약칭:국민회의)라는 당명을 가진 정당을 창당하고 그 당의 총재로 피선되었다.
국민회의 창당에는 구 민정당의 한 파벌로서 새한당을 창당하였던 이종찬(李鍾贊)계의 인사들도 참여하였다. 국민회의는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매스컴에 많이 등장하여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정치신인들을 국회의원선거 입후보자로 많이 영입하여 기성정치인들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유권자들의 지지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국민회의는 15대 총선에서 호남지역의 강한 지지에 근거하여 제1야당의 지위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성과를 배경으로 김대중은 1997년 5월 전당대회에서 15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할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997년 10월 김대중과 자유민주연합(약칭:자민련) 대통령 후보 김종필(金鍾泌)은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면 의원내각제 개헌을 추진한다는 전제조건하에 김대중을 두 당의 연합후보로 공천하기로 합의하였다. 김대중은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과 김종필의 고향인 호남과 충청 지역에서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당선되었다.
김대중의 당선으로 국민회의는 집권당이 되었으나 자기당의 국회의원 수가 적어 집권당의 구실을 제대로 수행하기가 어려웠다. 국민회의 국회의원 수는 재적의원 3분의 1에 불과하였고, 자민련의 의석과 합치더라도 국회재적 과반수에 미달하였다.
이에 국민회의는 야당의 국회의원들을 국민회의로 끌어들이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야당이며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의 잠재적 지지표를 삭감함으로써 김대중 후보의 당선에 기여한 이인제(李仁濟) 국민신당 소속의원들과 일부 무소속의원 및 한나라당 탈당의원 등을 흡수하여 의석을 78석에서 105석으로 증가시켰다. 그 결과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의석을 합쳐 국회의원 재적의 과반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 국민회의와 자민련 간의 협조가 악화되고, 옷로비 사건, 국민연금제 실시에 대한 비판여론이 고조됨으로써 2000년 4월에 실시될 16대 총선에서 국민회의가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을 전망하였다.
국민회의로는 총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김대중은 보다 많은 국회의원 당선자를 배출할 수 있는 새로운 정당의 창당을 추진하였다. 재야운동권세력 중 친김대중계의 모임인 국민정치연구회와 19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한 전대협의 역대의장 및 간부들이 국민회의 주도의 신당창당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2000년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였고, 그에 따라 국민회의는 창당 4년 4개월 만에 해소되었다. 새천년민주당은 총재로 김대중을 선출하였고, 김대중은 당대표로 서영훈(徐英勳)을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