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부터 2007년 8월까지 활동한 열린우리당은 새천년민주당을 계승한 정당으로,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탈당파들이 개혁국민정당과 2003년에 합당하여 창당되었다. 열린우리당은 "부패 정치, 밀실 정치, 지역 분열로 얼룩진 구시대를 마감하고, 국민 통합, 참여 민주주의, 깨끗한 정치의 새로운 시대를 실현할 정당"을 당의 일차 목표로 제시하였다.
2002년 대선이 끝난 후 민주당의 영남 지역과 소장파, 천정배 · 신기남 · 정동영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 신주류 세력들은 새천년민주당의 쇄신을 주장하였다. 이는 2004년 총선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새천년민주당은 김대중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의 외연 확대와 전국 정당화를 위해 2000년 재창당한 정당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첫 해에 쇄신 여부로 여당 내에서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쇄신을 주장하는 ‘천신정(천정배 · 신기남 · 정동영)’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 신주류와 친노 측은 총선 승리를 위해 과감한 재창당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 구주류는 재창당 주장이 민주당의 뿌리인 호남 세력을 비토하기 위한 음모라고 보아 거부하였다. 송영길 · 우상호 · 임종석 등 개혁 소장파는 합의를 요구했지만, 박상천 · 권노갑 등의 보수 노장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런데 분당 시점에는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적극 지지했던 개혁파 조순형 · 추미애 등조차 잔류하기로 하였다. 잔류자가 70여 명으로 탈당파보다 더 많았다. 결국 ‘개혁 신당파’들이 탈당하면서 여당이 집권 초기에 분당하는 ‘집권당 교체’가 발생하였다.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도 5명의 개혁 성향 의원인 이부영 · 이우재 · 김부겸 · 김영춘 · 안영근[속칭 ‘독수리 오 형제’]이 탈당해 신당에 합류했고, 김원웅 · 유시민을 주축으로 한 개혁국민정당도 신당과 합당하였다.
마침내 2003년 11월 11일에 민주당 탈당파 40석, 한나라당 탈당파 5석, 개혁국민정당 2석 등 총 47석이 모여 소수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다. 창당대회에서는 당의장에 정동영, 상임중앙위원에 신기남 · 이부영 · 김정길 · 이미경, 원내대표에 김근태를 선출하였다.
열린우리당의 강령은 대강 다음과 같다.
새로운 정치: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 존중, 의회 민주주의 정착, 전자 민주주의 활성화. 국민의 참여 기회 확대, 국민 통합 이룩, 바른 정치 실현. 정부 개혁과 지방 분권 적극 추진, 주민 자치 · 생활 자치 실현, 능동적인 고품질 정부 구현.
잘사는 나라: 공정한 경쟁 질서 확립, 성장과 분배 조화를 이루는 시장 경제 질서 형성. 소득 재분배, 부의 부당한 대물림 방지. 차세대 성장 동력 산업 적극 육성, 동북아 경제 중심 건설, 국가 균형 발전.
따뜻한 나라: 완전한 기초생활 보장, 사회보험 내실화, 근로자 일자리 제공 및 공정한 대우. 평생 건강권 보장. 지식 문화 강국 건설. 양성 평등 기반 조성.
한반도 평화: 남북한 실질 협력 증진, 군사적 신뢰 구축, 주변 국가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와 남북 공동 번영 추구. 평화 통일 기반 조성, 자주적 방위 역량 확보, 적극적인 다자 외교 및 경제 · 통상 외교 통해 국가 위상 제고, 경제 발전 토대 마련.
그런데 2004년 3월 12일 한나라당 · 민주당 · 자민련 의원 195명 투표, 193명 찬성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다. 곧바로 탄핵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시작되었다. ‘의회 쿠데타’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서울에서는 연일 촛불집회가 열렸다.
탄핵 무효를 외치는 시민들이 급속도로 늘었다. 탄핵 정국에서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치솟았고, 4 · 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압승을 거두었다. 152석을 얻어 과반을 차지하였다. 한나라당은 121석을 얻어 제2당으로 전락했고,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어 제3당이 되었다. 민주당은 9석, 자민련은 4석을 얻어 몰락하였다. 이는 민주화 이후 수립된 제6공화국 최초의 여대 야소였다.
민주 개혁 세력이 처음으로 정부와 의회를 모두 장악하였다. 헌법재판소는 탄핵소추안을 기각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공약 사항인 행정 수도 이전이 헌재의 위헌 판결로 좌절되고, 열린우리당이 추진한 ‘4대 개혁 입법 [국가보안법 폐지 · 사립학교법 · 과거사진상규명법 · 언론 관계법]’도 야당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후 재보궐 선거에서 연속 패배하여 여소 야대로 되돌아갔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에 참패하자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였다. 본격적인 정치권 재편 흐름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버렸던 민주당과의 재통합 을 시도하고 반한나라당 세력들과 연합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2007년 내내 다양한 계파 소속 의원들이 열린우리당을 탈당하였다. 이들이 중도 개혁 세력을 표방하며 ‘대통합민주신당’을 결성하였다.
2007년 8월 18일 마지막 전당 대회에서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을 가결했고, 8월 20일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하면서 사라졌다. 대통합민주신당은 143석이 되었다. 결국 열린우리당 탈당 세력, 민주당 탈당 세력 일부,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세력이 합친 셈이었다.
열린민주당의 등장과 해체는 ‘집권당의 교체’와 ‘집권당의 해체’를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열린 민주당은 제도화에 실패했고, 정당 재편은 좌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