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민주당은 1995년 12월 21일 민주당이 개혁신당과 통합하여 만든 정당이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 낙선 직후 정계를 은퇴했던 김대중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은 정계에 복귀한 뒤 자신과 가까운 인사들을 민주당에서 탈당시켜 1995년 9월 5일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같은 해 12월 21일 민주당 잔류 인사들은 시민단체 계열의 개혁 신당과 합당하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제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11월 24일 신한국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을 창당하였다.
1995년 6월 27일 치러진 전국동시지방선거 결과에서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참패를 하였다.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는 민자당 5, 민주당 4, 자민련 4, 무소속 2로 나타났다. 여당은 5, 야당은 10으로 여당의 완패였다. 기초단체장에서도 민자당 69, 민주당 84를 기록하였다. 광역의원 또한 민자당 284, 민주당 353으로 여당의 열세였다.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선전하자 김대중은 정계 복귀를 공식화하였다. 지방선거 당시 경기도지사 후보 공천을 놓고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민정계 출신의 이종찬을 추천하였다. 공천권을 쥐고 있었던 이기택 대표는 장경우 전 의원을 내세웠다.
당내 경선에서는 장경우가 이겼지만 정작 본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 이인제가 당선되었다. 당권파인 이기택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민주당을 탈당한 김대중은 자파 의원들과 외부 인사들을 결합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세정치국민회의에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에 잔류한 인사들은 시민 운동 계열 인사들을 영입하여 통합민주당을 창당하였다. 민주화 운동 시절의 명사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의 시민단체가 ‘개혁 신당’을 창당한 후 합당함으로써 개혁적인 정당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통합민주당 소속 개별 정치인들의 대중적인 인지도는 높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3김 중심의 정치 구도에서 제4당의 입지는 좁았다.
1996년 4월 11일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여당인 신한국당이 139석[지역구 121석+전국구 18석]을 확보하였다. 야당은 새정치국민회의 79석[지역구 66석+전국구 13석], 자유민주연합 50석[지역구 41석+전국구 9석], 통합민주당 15석[지역구 9석+전국구 6석], 무소속 16석을 확보하였다.
통합민주당은 15석 확보에 그쳐 원내 교섭 단체 구성에 실패하면서 당세가 약해졌다. 서울시에서는 강동구 갑의 이부영을 제외하고 전원 낙선했고, 부산에서는 이기택 대표를 포함하여 전원이 낙선하였다. 총선 후 신한국당이 과반수 확보를 위해 의원들을 빼가면서 당세가 더욱 줄었다.
서울에서 민주당은 거의 전 지역에서 3위로 낙선하였다. 당시 서울의 47개 선거구에서 여당인 신한국당이 과반인 27석[국민회의 18석, 통합민주당 1석, 무소속 1석]을 차지했는데, 이는 야권 표가 나뉘었기 때문이었다. 확고한 지지 기반을 가진 거대 양당제에 유리한 소선거구제에서 야권 분열은 패배로 직결되었던 것이다.
제15대 총선 참패 후인 1996년 6월 13일 ‘민주당’으로 당명을 개칭하였다. 1997년 12월 18일 치러질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이기택 민주당 총재가 8월 8일 조순 서울시장에게 대통령 후보 및 총재직을 제안하였다. 9월 18일 민주당은 조순을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같은 해 11월 들어 조순 후보의 지지율이 점점 떨어지자, 신한국당과 합당을 추진하였다. 11월 24일 양당은 통합하여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창당하면서 민주당은 사라졌다. 이때 노무현, 김원기, 김정길 등은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였다.
통합민주당은 3김 시대를 극복하고 지역주의를 넘어서는 국민 통합적 민주 정당을 지향하였다. 그렇지만 강고한 지역 기반의 정치 구조를 극복하지 못하고 양당 구도에 매몰된 측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