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과 김대중은 야권의 핵심 인물이었지만 신군부정권에 의해 제도권 정치 참여가 배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영삼과 김대중 진영은 신군부독재에 저항하고 양 세력의 연대를 도모하는 한편 제도권 정치 진출의 가교로서 민주화추진협의회(약칭 민추협)을 조직했다.
1980년대 초반 야당의 양대 세력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제도 정치권 진출에 제한을 받고 있었다. 김영삼은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고 김대중은 미국에 망명 중이었다. 1983년 5월 김영삼은 단식농성으로 저항했다. 김대중 · 김영삼의 8·15공동선언 발표를 계기로 양 진영이 결집하여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다음해 2월의 12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하였다. 공동의장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을 추대했다. 그러나 당시에 김대중은 해외체류 중이이서 그를 대신하여 김상현이 공동의장 대행을 맡았다.
민추협은 제도 정치권 진입을 위한 사전조직의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비정치인을 배제하고 규약 · 강령도 채택하지 않았다. 각종 성명서 및 기자회견을 통하여 반정부활동을 전개했다. 1985년 2월 국회의원 총선거 직전인 1985년 1월 18일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하는 기반이 되었다. 신민당은 제1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누르고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 김영삼의 신민당 입당 이후 민추협의 역할은 축소되어 갔다. 1987년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양김(兩金: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로 인하여 해체되었다.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을 고문으로 한 법인체를 만들어 부활했지만 그 위상과 역할은 미미했다.
민추협은 김영삼과 김대중 양자의 연대와 제도정치권 진출의 기반이 되었고 반독재민주화운동에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