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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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설치한 국가정보 · 수사기관.
이칭
이칭
중정, 정보부, K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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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중앙정보부는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설치한 국가정보·수사기관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의 주체들이 주도하여 군사정부 최고 의결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설치하였다. 군사정부의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제거하고,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며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범죄를 수사하고, 군을 포함한 국가 각 기관의 정보·수사 활동을 조정·감독하는 특수 기관이었다. 1979년 10·26 사건을 계기로 신군부가 주도하여 입법한 국가안전기획부법에 따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되었다.

목차
정의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설치한 국가정보 · 수사기관.
내용

1961년 5월 20일, 5 · 16 군사정변의 주체들이 주도하여 군사정부 최고 의결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설치한 정보기관이자 수사기관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6월 10일 국가재건최고회의법과 중앙정보부법을 통해 중앙정보부의 설치 근거를 명문화하였다. 이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군사정부의 이른바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요인을 제거하고,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며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범죄를 수사하고, 군을 포함한 국가 각 기관의 정보 · 수사 활동을 조정 · 감독하는 특수 기관이었다.

중앙정보부의 제도적 특권은 중앙정보부의 수사권을 검찰의 지휘 아래 두지 않고 오히려 검찰을 지휘 · 관리하도록 한 점과 중앙정보부의 업무수행에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전 국가기관이 해주도록 한 점에서도 확인된다. 더 나아가 1963년 12월 14일 개정된 중앙정보부법은 대통령 소속 기관으로서 중앙정보부의 조직 구성, 소재지, 정원, 예산 및 결산 등에 대한 비공개를 합법화하였고, 또 타부처 예산에 중앙정보부의 예산을 계상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중앙정보부의 설치는 일견 국가 관료제의 합리화 차원에서 중요한 조치였다. 그것으로 인해 국가정보의 수집과 관리가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틀에 맞추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가 설치되기 이전까지는 군과 경찰을 중심으로 복수의 정보기관들이 각기 부문 기관으로서만 분산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데에 비해, 중앙정보부는 그러한 부문 기관들을 총괄적으로 조정 · 감독하는 권한을 확보하여 국가중앙정보기관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중앙정보부의 수립으로 국가가 해외정보에 체계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79부대(이승만 정부 시기)나 중앙정보연구위원회(장면 정부 시기)가 미국 중앙정보부에 대한 창구 역할을 하면서 해외정보를 지원받는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는 각종 해외정보를 국가정책의 수요에 맞추어 한층 주도적으로 수집 · 관리하는 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설치 시점부터 존립한 시기 내내 집권 정치세력의 공작정치와 시민 기본권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질 만큼 많은 정치적 갈등과 대립에 관여하였고, 그러한 정황의 적극적 조성자로 기능하였다. 정치적 활동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중앙정보부의 실상은 방대한 조직과 인원을 동원하여 대통령을 정점에 둔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과 반대 활동을 감시 · 통제하는 데에 집중하는 기관이었다. 중앙정보부의 감시 · 통제 대상에는 시민사회의 개인 및 단체는 물론이고 야당 국회의원과 여당 국회의원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중앙정보부의 활동 양상은 특정 방침의 고지 · 명령, 기관 상주 및 탐문, 도청과 미행, 고문, 납치 등 다양하고도 극단적이었다. 장도영 반혁명 사건, 민주공화당 사전조직 논란, 4대 의혹 사건, 동베를린 사건, 국민복지연구회 사건, 4 · 8항명 파동, 10 · 2항명 파동, 3선개헌 파동, 김대중납치 사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동일방직 사건, YH무역 사건, 오원춘 사건 등 1960∼70년대 정치사의 주요 대목들에서, 중앙정보부는 항상 주요 당사자였다. 그리고 중앙정보부는 암암리에 정부의 시책을 홍보하고 정부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앙정보부는 기존 군인 요원들 외에 때때로 공채를 통한 인원 충원을 하기도 하였고, 또 부사관과 소령급 이상의 장교들을 파견 받아 채용하였는데, 대령과 준장급 인력을 특별보좌관이나 차장보로 배치하였다. 중앙정보부는 1963년 3월 이후 장관급 부서였으나 1972년 제4공화국(유신체제) 수립 이후에는 부총리급으로 격상되었다. 10 · 26 사건과 제4공화국의 해소, 이른바 신군부의 집권 등으로 이어지는 정황 속에서 1981년 1월 1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되었다.

변천과 현황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유지되던 국가정보 · 수사의 운영체계는 1979년 10 · 26 사건을 계기로 변화하였다. 1979년 10월 27일 계엄사령부가 계엄공고 제5호를 발표하면서 계엄사령부 내에 합동수사본부를, 지방계엄사무소(계엄분소)에 합동수사단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합동수사본부 및 지방계엄사무소가 정보 및 보안 업무의 조정 · 감독을 담당토록 조치하였다. 이로써 합동수사본부가 1979년 10월 27일부터 1981년 1월 24일 비상계엄이 완전히 해제될 때까지 중앙정보부를 대체해 모든 정보 · 수사기관들을 통제 · 관리하였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국군보안사령관이 겸임하였다. 국군보안사령부가 대통령 및 중앙정보부장이 공석이 된 상황에서 합동수사본부를 만들어 모든 정보 · 수사기관들을 장악한 것이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신군부가 주도하여 입법한 국가안전기획부법에 따라 1981년 1월 1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개칭 이후로도 중앙정보부의 기능과 위상은 대체로 유지되었다.

국가안전기획부법은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기간의 초헌법적 정치사찰, 인권침해와 강압적 수사 등이 문제시되어, 1994년 1월 5일과 1997년 12월 13일 일부 개정되었고, 1999년 1월 21일 다시 일부 개정됨과 아울러 국가안전기획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칭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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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들』(조갑제, 기파랑, 2009)
『박정희, 5·16의 24시』(조갑제, 조선일보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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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산책: 1970년대편』(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2)
『한권으로 보는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김삼웅, 가람기획, 1994)
『비록 중앙정보부』(문일석, 물결, 1993)
『남산의 부장들: 정치공작사령부 KCIA』(김충식·이도성, 동아일보사, 1993)
『혁명과 우상』(김경재, 전예원, 1991)
『한국근현대사사전』(한국사사전편찬회, 가람기획, 1990)
『동아일보』(1980.12.22)
「국가재건최고회의법」(법률 제618호, 1961.6.10)
「중앙정보부법」(법률 제619호, 1961.6.10 ; 법률 제1510호, 1963.12.14)
「안전기획부법」(법률 제3313호, 1980.12.31 ; 법률 제4708호, 1994.1.5)
「국가정보원법 (법률 제5681호, 1999.1.21)
『분단한국사』 (김정원, 동녘, 1985)
집필자
김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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