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소장 중심의 주체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입법 · 사법 · 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회와 지방의회를 해산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8일 장면 국무총리로부터 계엄령 추인과 함께 정권을 인수받자, 5월 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라 개명하고 5월 20일 혁명내각을 발표함으로써 군사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군사정부의 실질적인 최고통치의결기구가 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6월 6일 제정 · 공포된 ' 국가재건비상조치법(國家再建非常措置法)'에 의해 최고통치기구로서의 법적인 뒷받침을 가지게 되었다.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하루 전인 1963년 12월 16일까지 존속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20명 이상 30명 이내의 현역 또는 예비역 장교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을 정점으로 상임위원회 · 분과위원회 · 특별위원회, 실무지원을 위한 총무처, 대외선전을 위한 공보실을 두었다. 상임위원회는 의장 · 부의장과 각 분과위원장으로 구성되어 위임사항에 대하여는 최고회의의 권한을 대행했다. 법제 · 사법내무 · 외무국방 · 재정경제 · 교통체신 · 문교사회 · 운영기획의 7개 분과위원회는 해당 분야의 기본정책을 수립하고 국회를 대신하여 국정감사, 예산심의를 실시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본회의는 최고위원 8명 이상의 요구에 의하여 재적최고위원 과반수 이상이 출석하면 개의되었다. 의안의 발의는 최고위원 3명 이상의 찬성으로 이루어졌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활동했던 2년 7개월 동안 헌법을 포함하여 총 1,593건의 의안을 처리했으며, 이 중 1,436건의 가결, 2건의 부결, 111건의 폐기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검찰부 · 혁명재판소를 직속으로 두고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억압하는 한편, 부정축재처리 · 정치활동정화 · 헌법심의위원회 등의 특별위원회와 중앙정보부 등을 통해 제3공화국의 출범과 군사정변 주체세력의 민간정부 집권을 위한 모든 정치적 조치와 법적 · 제도적 절차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