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검찰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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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7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의거하여 설치되었던 특별검찰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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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7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의거하여 설치되었던 특별검찰기관.
내용

4·19혁명 후 당시 집권당인 민주당의 특별법제정에 따라 1960년 12월 30일 발족한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는 반혁명 및 반민주사건처리를 담당하게 하였으나 자체 내의 정치적 복선으로 재판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후 혁명정부는 5·16군사정변 이전과 이후의 반국가·반민족행위사건, 반혁명행위사건 및 기존의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에서 기결 또는 계속 공판중인 사건 등을 처리하기 위하여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조직법>을 공포하고 1961년 7월 7일 발족하였다.

이것의 법적 근거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제22조 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군사정변 이전 또는 이후에 반국가적·반민족적 부정행위 또는 반혁명적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

② 전항의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데 있다. 여기에 근거하여 혁명검찰부에는 부장 박창암(朴蒼巖) 1인을 두고, 부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제청에 의하여 대통령이 임명하며, 부장은 혁명검찰부의 일반사무를 관장하고 소속직원을 지휘감독한다고 하였다.

또한, 혁명검찰부에 30인 이내의 검찰관을 두고 검찰관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승인을 얻어 혁명검찰부장이 임명하고, 검찰관은 앞서의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제22조 1항에 따른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및 <부정축재처리법>에 규정된 범죄사건에 관하여 <국방경비법>·<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에 의한 검찰관과 검사의 직무와 권한을 행사한다고 하였다.

혁명검찰부는 현직검사 10명과 현역법무장교 20명 합계 30명의 검찰관으로 구성, 1961년 7월 12일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혁명검찰부에는 부장 밑에 1심검찰이 제1·2·3·4·5의 5개 부를 두고, 상소검찰에 제1·2의 2개 부를 두어 재판부에 맞추어 설치하였다.

혁명검찰부의 공소시효는 당시 1961년 12월 11일 밤 12시로 만료되게 하였다. 이것으로 5개월 동안 계속해 온 수사활동이 끝을 맺었는데 잔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혁명재판의 법정심판기간까지는 존속하도록 하였다.

혁명검찰부가 기소한 인원은 총 551건 713명에 달한다. 혁명검찰부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여 3·15부정선거사건, 7·29선거 난동사건, 특수반국가행위사건, 반혁명사건, 단체적 폭력행위사건, 특수밀수사건, 국사 및 군사에 관한 독직사건, 부정축재사건 등에 걸쳐 혁명적 수술을 가하였다. 그리고 판결확정자에 대하여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확인을 얻어 형을 집행하였다.

참고문헌

『한국혁명재판사』 제2집(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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