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해방 이후 국무총리, 부통령 등을 역임한 정치인.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946년 정계에 투신, 민주의원(民主議院)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하면서 좌익과의 투쟁, 군정당국과의 절충,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수립 등의 활약을 하였다. 1948년서울 종로 을구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고, 같은 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조병옥(趙炳玉)·장기영(張基永) 등과 한국수석대표로 참석, 총회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국제적 승인을 얻어냈다. 이어 대통령특사로 교황청을 방문, 돌아오는 길에 맨해튼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고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 한국파병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하였다. 이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다. 1955년신익희(申翼熙)·조병옥 등과 민주당(民主黨)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에는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가 사망한 민주당의 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해 9월 민주당전당대회에서 저격당하였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7년 미국 시튼 홀대학에서 다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9년민주당의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선거 1개월을 앞두고 사망함으로써 다시 한번 부통령후보로 선거에 임했다. 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이기붕(李起鵬)자유당후보에게 833만 표 대 180만 표의 차이로 낙선하였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의원내각제 하에서 1960년 제5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고, 국회에서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집권 후 민주당의 구파가 신민당(新民黨)을 창당, 이탈해나가는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던 정책이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여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뒤 군사정권의 정치정화법에 묶여 연금생활을 강요당하고, 세칭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루,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 5년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1966년 6월 4일 지병인 간염으로 사망하였다.
추모 및 상훈
평가
참고문헌
- 『장면·윤보선·박정희』(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백산서당, 2001)
- 『역대위인실록』(교육주보사, 1983)
-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장면박사회고록』(운석선생기념출판위원회, 양우당, 1967)
- 『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장면 외, 희망출판사, 1966)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근현대인물자료(www.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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