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는 일제강점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저술한 시인이다. 1917년에 태어나 1945년에 사망했다. 중학생 시절부터 시를 썼고,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뒤 1942년 일본으로 가서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그 해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했다. 1941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다 실패했으며, 1943년 귀향 직전 항일운동 혐의로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은 뒤 광복을 앞두고 28세의 나이로 형무소에서 생을 마쳤다. 광복 후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달라즈[大拉子] 중국인 관립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용정(龍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에 편입, 졸업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귀향 직전에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송몽규와 함께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에서 생을 마쳤다.
교우 관계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함께 하숙 생활을 하였으며 윤동주의 자필 시집을 보관, 출간한 정병욱(鄭炳昱), 초간 시집에 추모시를 쓴 유령(柳玲), 연희전문학교 후배 장덕순(張德順), 고향 후배 문익환(文益煥), 평양 숭실중학교 동기 김형석(金亨錫) 등이 있다.
처녀작은 15세 때 쓴 시 「삶과 죽음」 · 「초한대」이며, 이 두 편의 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미루어 습작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발표된 작품을 살펴보면 광명중학교 4학년 당시 간도 연길(延吉)에서 나온 『가톨릭 소년(少年)』에 동시 「병아리」(1936.11.) · 「빗자루」(1936.12.) · 「오줌싸개지도」(1937.1.) · 「무얼 먹구사나」(1937.3.) · 「거짓부리」(1937.10.) 등이 있다. 연희전문시절에는 『조선일보』 학생란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연희전문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게재된 「자화상」 · 「새로운 길」, 그의 사후인 1946년 『경향신문』에 발표된 시 「쉽게 씌여진 시」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20세를 전후하여 10여 년간 전개된 시력여정(詩歷旅程)은 청년기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조국을 잃음으로써 삶의 현장을 박탈당한 동일성의 상실이 그 원천을 이룬다. 초기 시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와 더불어 동시(童詩)에 깃들인 유년적 평화를 지향하고자 하는 현실 파악 태도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으로는 「겨울」 · 「조개껍질」 · 「버선본」 · 「햇빛 · 바람」 등이 있다. 후기 시로 볼 수 있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에 쓰여진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 「자화상」 · 「또 다른 고향」 · 「별 헤는 밤」 ·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윤동주의 시는 한마디로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였다. 동시에 특정한 사회 · 문화적 상황 속에서 체험한 것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관련지음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에 도달하였다. 유해는 고향 용정에 묻혔고, 1968년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