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촌 ()

촌락
지명
1910~1920년대 중국 북간도 일대의 대표적인 한인 촌락.
정의
1910~1920년대 중국 북간도 일대의 대표적인 한인 촌락.
개설

명동촌은 중국 길림성 용정시 용정에서 서남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문치정 · 남위언 · 김하규 · 김약연 등 네 집안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형성하였다. 1899년~1905년에 형성되었는데, 용암 · 장재 · 대룡 · 영암 등을 묶어 명동촌이라고 부르며, 주변의 소룡동 · 풍락동 · 들미동 · 중왕동 · 상중왕동 등을 포함하여 명동촌이라고도 한다. 1910∼1920년대 중국 북간도 지역 한인의 문화교육운동 중심지였다.

명칭 유래

명동촌이 자리한 곳의 원래 이름은 ‘비둘기 바위’라는 뜻을 지닌 ‘부걸라재(鵓鴿磖子)’였다. 그 뒤 김약연 등이 이곳을 ‘동방, 곧 한반도를 밝히는 곳’으로 만들고자 ‘명동촌’이라고 이름하였다.

형성 및 변천

1899년 2월 18일에 문치정(文治政) 집안의 40명, 김하규(金河奎) 집안의 63명, 김약연(金躍淵, 1868∼1942) 집안의 31명, 남위언(南葦彦) 집안의 7명, 안내자 김항덕 등 142명이 이상촌 건설과 인재교육 등을 목적으로 북간도 부걸라재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부걸라재를 ‘명동촌’이라고 이름하고는, 부걸라재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고자 하였다. 당시 일대의 토지는 중국인 지주인 동한(董閑)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총면적 약 600만 평 가운데 대부분의 땅은 산림이었고 개간된 땅은 불과 4∼5만 평 정도였다. 네 집안은 1,000여 경 규모의 땅을 매입하였는데, 당시 1경은 소 한 마리가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크기였다.

그 뒤 공동으로 부담하여 학전(學田)을 마련하였고, 학전에서 나오는 수입을 교육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문치정 집안은 동구(東溝), 김하규 집안은 대사동(大蛇洞, 龍洞), 김약연 집안은 선봉(先鋒) 남쪽 기슭인 장재촌(長財村), 남위언 집안은 중영촌(中英村)에 각각 정착하였다. 1900년에는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가족을 이끌고 용암동(龍岩洞, 학교촌)으로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1899년∼1905년에 용암 · 장재 · 대룡 · 영암 등 4곳의 대표적인 마을이 명동촌이라고 불렸고, 주변의 소룡동 · 풍락동 · 들미동 · 중왕동 · 상중왕동 등도 점차 명동촌의 외연에 포함되었다.

한편 김약연 등은 명동촌을 기울어 가는 조선의 운명을 바로 세울 인재를 기르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901년에 김약연은 장재촌에 ‘규암재(圭岩齋)’를 세웠고, 남위언은 상중영촌에 ‘오룡재(五龍齋)’를 두었으며, 김하규는 대룡동에 ‘소암재(素岩齋)’라는 서재를 각각 건립하여 학동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1908년 4월 27일에는 김약연 등이 여러 서재를 합하여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였다. 명동서숙은 서전서숙(瑞甸書塾)에서 근무하였던 교사들을 초빙하여 그 맥을 이어갔다. 그 뒤1909년에 명동서숙은 명동학교로 바뀌었고, 1910년에는 명동중학으로 발전하였으며, 1911년에는 명동여학교가 설립되어, 북간도 지역 민족교육운동의 본산으로 자리하였다.

아울러 1909년에 명동학교 교무주임 정재면(鄭載冕) 등이 김약연 등의 협조를 받아 명동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700여 명의 명동촌 남자와 여자가 모여 부흥회를 열 정도로 발전하였다. 명동촌은 명동교회를 통해서 유교 공동체 사회에서 근대 기독교 문화 공동체로 변화하였다.

현황

중국 길림성 용정시 측은 명동촌을 관광지로 만들고 있다. 2011년 명동학교 복원, 2012년 8월 윤동주 생가와 명동교회 단장, 전람관 신축 등이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규암 김약연과 명동촌」(김재홍,『북간도 한인의 삶과 애환 그리고 문화』,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한국독립의 해외사적 탐방기』(윤병석, 지식산업사, 1994)
집필자
김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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