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간도의 대표적인 조선인 마을인 명동촌을 세우고, 민족교육기관인 명동학교의 설립에 참여하면서 최초의 교사를 맡았다.
남종구의 아들로 함경북도 종성군에서 태어났다. 1899년 2월 18일에 남위언 집안의 7명, 문치정 집안의 40명, 김하규 집안의 63명, 김약연 집안의 31명 등 142명이 이상촌 건설과 인재교육 등을 목적으로 북간도 부걸라재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부걸라재를 ‘동방, 곧 한반도를 밝히는 곳’으로 만들고자 ‘명동촌’이라고 이름하고는 중국인 지주인 동한(董閑)에게 1,000여 경 규모의 땅을 매입하였다. 그 뒤 공동으로 부담하여 학전(學田)을 마련하였고, 학전에서 나오는 수입을 교육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남위언 집안은 명동 중영촌에 자리를 잡았는데, 1901년에 남위언이 증조부의 호를 따서 ‘오룡재’라는 서당을 중영촌에 세웠다. 김약연은 용암촌에 ‘규암재’라는 서당을 두었고, 김하규는 대룡동에 ‘소암재’라는 서당을 열었다. 1908년 4월 27일에 남위언은 김약연 등과 함께 이전의 서당을 통합하여 명동서숙(明洞書塾)을 설립하고, 명동서숙 최초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그 뒤 명동서숙은 1909년에 명동학교로 바뀌었고, 1910년에는 명동중학으로 발전하였으며, 1911년에는 명동여학교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이 때 남위언은 명동중학교 교사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