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설립자와 졸업생의 지원으로 운영된 학교로,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한 만주 일대 반일운동의 본산이었다.
1918년에 조용석(趙庸錫, 1861∼1920)이 중국 길림성 통화현 배달촌에 설립한 민족학교이다. 조용석은 1919년에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한족회(韓族會)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단체인 경학사(耕學社),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설립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이시영(李始榮, 1869∼1953) 등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배달학교를 세웠다. 배달학교는 초등과 야학 과정을 두어 만주 일대 한인 사회의 교육 수요를 만족시키는 한편 많은 애국 청년들을 양성하였다. 특히 신흥무관학교 설립자는 물론 졸업생의 지원으로 운영되면서, 신흥무관학교 교과 과정에 준하는 철저한 민족주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1920년에 일제가 만주 일대의 무고한 한인을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을 때, 배달학교는 통화현 지역 반일운동의 본산으로 지목되었다. 11월에 교장 조용석을 포함하여 김기선(金基善, 18881920)·조동호(趙東鎬)·승대언(承大彦, 18741920)·승병균(承昞均, 1893~1920)·최찬화(崔贊化)·김기준(金基畯, 1895?~1920) 등 교직원 7명은 배달학교를 습격한 일본군 토벌대에 의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죄를 뒤집어 쓰고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배달학교는 폐교되었다. 그 뒤 학교 주변 마을 사람들은 일제의 감시와 신변 위협을 무릅쓰고 교직원 7명의 장례식을 간소하지만 정중하게 치루었다.
1996년에 중국 길림성 통화현 정부는 김기선의 후손과 함께 7인의 묘비와 묘소를 조성하였다. 묘소는 원래의 배달학교 터에서 약간 떨어져 있지만 마을이 보이는 곳에 잘 정돈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
배달학교는 만주 일대 한인 사회의 구심점 중 하나로, 독립운동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던 요람이었다. 통화현 일대 한인 학생에게 새로운 근대문화를 전수하면서 민족 교육을 강조하였던 한인 민족학교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