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에 정재면이 명동촌 촌민의 민족주의 신장을 위하여 설립한 교회이다. 1917년에는 교인이 7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중국 북간도 지역 반일교육운동의 중심지로 자리하였다. 현재 명동교회 옛터는 명동촌역사전람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1909년에 명동학교 교무주임이었던 정재면(鄭載冕) 등이 명동촌(明東村)에 설립하였다. 명동촌에는 1908년에 명동촌 개척의 주역인 김약연(金躍淵, 1868∼1942)이 박무림(朴茂林), 김학연(金學淵) 등과 함께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세웠다. 그 뒤 1910년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따로 세우고 김약연이 교장을 맡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재면은 명동교회 설립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곧 첫째, 근대 민족주의를 신장시키려면 유교보다는 기독교가 참신하고 우월하며, 둘째, 중국과 일본의 견제를 보다 적게 받으려면 기독교에 귀의하는 편이 낫다고 하였다. 정재면은 김약연 등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명동학교를 기독교계 학교로 개편하고서 명동교회를 설립하였다. 당시 교회에서는 주일에 명동촌 남자와 여자 200여 명이 함께 모여 예배를 보았는데, 1917년에는 700여 명이 모여 부흥회를 열 정도로 발전하였다.
1911년에 명동여학교가 따로 설립되면서, 명동교회에 다니던 여자들은 남자처럼 한문으로 된 이름을 사용하였다. 곧 여자는 어렸을 때는 ‘고만네’, ‘개똥네’, ‘곱단이’ 등의 아명으로 불리다가 결혼한 뒤 회령댁, 종성댁, 사동댁 등의 택호로 불렸다. 그런데 신앙에 대한 믿음을 상징하기 위해서 이름 첫자에 ‘믿을 신(信)’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으며, 김신묵(金信黙)·김신우(金信宇)·김신영(金信永)·윤신현(尹信鉉) 등 50여 명의 여자들은 ‘신’자를 항렬로 삼아 이름을 짓기도 하였다.
명동교회는 명동촌에 기독교 문화를 널리 알리고, 명동촌 한인사회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으로 기능하였다. 특히 여자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유교 공동체 사회였던 명동촌은 근대 기독교 문화 공동체로 변화되었고, 남녀평등사상도 널리 파급되었다. 또한 명동학교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명동촌이 북간도 지역 반일교육운동의 중심지로 거듭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