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은 일제강점기 「깃발」, 「그리움」, 「일월」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호는 청마이다. 1927년 시단을 풍미하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지용의 시에 감동하여, 형 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소제부』를 만들어 시를 발표했다.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했다.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발간했다. 광복 후 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문학 운동을 전개했다. ‘생명파 시인’으로 출발해 40여 년에 걸친 그의 시작은 한결같이 남성적 어조로 일관하여 생활과 자연, 애련과 의지 등을 노래하고 있다.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청마(靑馬). 경상남도 통영 출신. 유준수(柳焌秀)의 8남매 중 둘째 아들이며,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의 동생이다.
11세까지 외가에서 한문을 배웠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일본 도요야마중학교[豊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형 치진이 중심이 된 동인지 『토성(土聲)』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가세가 기울어 4학년 때 귀국, 1926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이듬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퇴폐적인 분위기에 불만을 품고 1년 만에 중퇴하였다. 당시 시단을 풍미하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감동하여, 형 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소제부(掃除夫)』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 『문예월간(文藝月刊)』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뒤 잡다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 부산에서 문예동인지 『생리(生理)』를 주재하여 5집까지 간행하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발간하였다. 여기에 초기의 대표작인 「깃발」 · 「그리움」 · 「일월」 등 55편이 수록되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연수현(煙首縣)으로 이주하여, 농장 관리인 등에 종사하면서 5년여에 걸쳐 온갖 고생을 맛보고, 광복 직전에 귀국하였다.
이때 만주의 황량한 광야를 배경으로 한 허무 의식과 가열한 생의 의지를 쓴 시 「절도(絶島)」 · 「수(首)」 · 「절명지(絶命地)」 등이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되었다. 광복 후에는 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문학 운동을 전개하였고, 6 · 25전쟁 중에는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의 일원으로 보병 3사단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보병과 더불어』는 이 무렵의 시집이다. 1953년부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이 후에는 줄곧 교직으로 일관하였다. 안의중학교(安義中學校) 교장을 시작으로 하여 경주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거쳐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교통사고로 작고하였다.
40여 년에 걸친 그의 시작은 한결같이 남성적 어조로 일관하여 생활과 자연, 애련과 의지 등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세계를 ‘생명에의 의지’, ‘허무의 의지’, ‘비정의 철학’, ‘신채호적(申采浩的)인 선비기질의 시인’으로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생명의 긍정에서 서정주(徐廷柱)와 함께 이른바 ‘생명파 시인’으로 출발한 그의 시는 범신론적 자연애로 통하는 열애가 그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한편으로는 동양적인 허정(虛靜) · 무위(無爲)의 세계를 추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허무를 강인한 원시적 의지로 초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에 허무 의지의 극치인 ‘바위’와 고고함의 상징인 ‘나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묘지는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에 있으며, 그의 시비는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공원, 통영 남망공원(南望公園) 등에 세워졌다. 2000년 2월에는 경상남도 통영시 망일1길(정량동)에 청마문학관이 개관되었다.
시집으로는 『울릉도』 · 『청령일기(蜻蛉日記)』 · 『청마시집』 · 『제9시집』 · 『유치환선집』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 『미루나무와 남풍』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이 있다. 수상록으로는 『예루살렘의 닭』과 2권의 수필집,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