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는 일제강점기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중의 사망」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1901년에 태어나 1943년에 사망했다. 한때 일본에 유학했고 1922년 『백조』 창간호에 동인으로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했고 의열단 관련 사건으로 구금되기도 했다. 초기의 시에서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 인습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과 도전이 드러난다. 사회참여적 색조를 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으로, 치열한 반골기질이 표현되어 있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무량(無量) · 상화(尙火, 想華) · 백아(白啞). 경상북도 대구 출신.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이다.
7세에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앙중 · 고등학교) 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白基萬)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의하면,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玄鎭健) · 백기만 · 이상백(李相佰)과 『거화(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 활동(詩作活動)을 시작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 · 나도향(羅稻香) · 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金基鎭) 등과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 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 · 「불란서시정석」 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문단 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欷嘆)」(1922) · 「단조(單調)」(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 · 「이중(二重)의 사망」(1923) · 「나의 침실로」(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
특히, 「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 초기의 온갖 주제가 한데 결합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외적 금제로도 다스려질 수 없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이 있다.
또한 복합적인 인습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 · 도전이 있으며, 이 모두를 포용하는 낭만적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의 다른 표현인 ‘침실’이 등장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 「몽환병(夢幻病)」(개벽, 1925) · 「비음(緋音)」(개벽, 1925) · 「이별(離別)을 하느니」(조선문단, 1925)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경향파적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들로는 「가상」 · 「구루마꾼」 · 「엿장사」 · 「거러지」(이상은 개벽, 1925)가 있다. 한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는 사회참여적인 색조을 띤 원숙한 작품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인 만큼 치열한 반골기질의 표현으로 주목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조소(嘲笑)」(개벽, 1925) · 「통곡(慟哭)」(개벽, 1926) · 「도-쿄에서」(문예운동, 1926) · 「파-란비」「신여성, 1926」 · 「선구자(先驅者)의 노래」(개벽, 1925) · 「조선병(朝鮮病)」(개벽, 1926) · 「비갠 아침」(개벽, 1926) · 「저므는 놀안에서」(조선문예, 1928)가 있다.
그의 후기 작품 경향은 철저한 회의와 좌절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역천(逆天)」(시원, 1935) · 「서러운 해조」(문장, 1941) 등이 있다. 발굴된 작품으로는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6편을 비롯하여 58편이다.
문학사적으로 평가하면, 어떤 외부적 금제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연적 충동(情)의 가치를 역설한 이광수(李光洙)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백조파’ 동인의 한 사람이다.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으로,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 대한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화의 시비는 1946년 동향인 김소운(金素雲)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