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큘라의 명칭은 이들 구성원의 성 또는 이름의 첫 문자들을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파스큘라는 염군사(焰群社)에 비하여 그 구성원이 대부분 동경 유학생 출신으로 교양의 정도가 높은 편이었으며, 또한 ‘백조’ 동인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문학 활동의 유래도 오래되었다. 그 구성원 일부는 연극단체인 ‘ 토월회’에도 관계한 바 있지만 문학단체로서 조직 활동은 별로 특기할 것이 없다.
1925년 2월 천도교 기념회관에서 문예 강연 및 작품 낭독회를 가졌다. 이때의 모임은 박영희의 사회로 이루어졌으며 출연자와 그 강연 또는 낭독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석송(金石松)의 「서적(書籍) 이전과 이후」, 민태원(閔泰瑗)의 「저널리즘과 문예」, 이익상의 「문예의 시대성」, 이상화의 「이별하는 이」, 박영희의 「체홉연구」, 김기진의 「잡감편편(雜感片片)」 등이다.
그리고 김억(金億)의 「감상」, 박종화(朴鍾和)의 제목 미상, 연학년의 「월출(月出)」(각본), 안석주(安碩柱)의 『소감』 등이다.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사회단체와 합동으로 일본의 프로 작가 나카니시(中西伊之助)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고 간담회를 가진 바 있다. 그러나 염군사와 같은 독자적인 기관지 발간을 기도한 바는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파스큘라는 염군사와 합동하여 프롤레타리아문예운동의 조직적인 전개를 목적으로 하는 카프를 결성하고, 그 조직 활동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나 뒤에 프로문학운동이 이데올로기 일변도로 쏠리자 모두가 거기서 이탈한 것도 특기할만한 일이다. 한국 프로문예운동의 개척자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