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석영 ()

안석주(1901-1950)
안석주(1901-1950)
회화
인물
일제강점기 「노래하는 시절」 · 「바다여 말하라」 · 「춘풍」 등을 저술한 작가. 영화감독 · 배우 · 미술가.
이칭
이칭
안석주(安碩柱), 야스다 사카에(安田榮)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 4월 1일
사망 연도
1950년 2월 24일
출생지
서울
관련 사건
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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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안석영은 일제강점기 「노래하는 시절」·「바다여 말하라」·「춘풍」 등을 저술한 작가로 영화감독·배우·미술가이다. 1922년 11월 나도향의 연재소설 「환희」 삽화를 그렸다. 1923년에는 경향파 문학모임인 파스큘라에 참가했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1931년 7월 조선시나리오 작가협회 회원이 되어 대본을 집필하였다. 1937년 영화 「심청」으로 감독으로 데뷔하고, 영화지 『영화보』 창간에 참여했다. 1942년 일제가 만든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연출과 주임으로 활동하면서 다수의 평론에서 영화인의 전쟁협력과 전쟁 참여를 역설했다.

정의
일제강점기 「노래하는 시절」 · 「바다여 말하라」 · 「춘풍」 등을 저술한 작가. 영화감독 · 배우 · 미술가.
개설

아명은 안석영(安夕影)이고, 본명은 안석주(安碩柱)이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야스다 사카에(安田榮)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1년 4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나 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동경)의 양화연구소에서 공부한 후 귀국해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 강사로 재직하였다. 재직중 1922년 11월 나도향의 연재소설 「환희」 삽화를 그리면서 삽화가의 길을 걸었다. 같은 해 이기세가 주도한 극단 예술좌 공연에 출연하였고, 극단 토월회 창립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23년에는 박영희, 김복진 등이 주도한 경향파 문학작가 모임인 파스큘라에 참가하였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수업을 마쳤고, 1927년 극단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 미술감독 및 배우로 영화계에 입문하였으며, 12월 신문사 기자였던 이익상(李益相), 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영화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31년 7월 조선시나리오 작가협회 회원이 되었고 영화 「노래하는 시절」, 「바다여 말하라」, 「춘풍」 등의 대본을 썼으며 카프 영화 「화륜」의 대본을 공동으로 집필하였다. 1937년 8월 영화 「심청」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하였고, 단편시나리오 「청미(靑眉)」를 기고하였으며, 10월 영화지 『영화보』 창간에 참여하였다.

1938년 8월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평을 기고하였고, 1939년 1월 ‘우리 영화의 향상은 어떻게 도모해야 할까’ 좌담회에 참석하였다. 1939년 8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지휘한 조선영화인협회 이사로 위촉되면서 본격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하였다. 1940년 7월 ‘사변 3주년과 반도문화인의 여명’ 좌담회에 참석하여 일제의 영화통제를 옹호하였고, 12월 지원병 훈련소를 견학하고 「문화인도 입소필요」를 기고하였으며 같은 달인 12월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41년 3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지휘하는 조선영화인협회 상임이사에 임명되었으며, 징병을 권하는 영화를 연출하여 지원병제도와 황도정신을 옹호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조하였다.

1942년 9월 일제가 만든 영화회사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연출과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다수의 평론을 기고하여 전시체제 하에서 일제가 실시한 영화령을 비롯한 영화정책을 옹호하고 선전하였으며, 영화인의 전쟁협력과 전쟁참여를 역설하였고, 징병제 선전선동, 내선일체 강조, 황국신민의 의무를 피력하였다.

해방 후 조선영화건설본부 내무부 부장을 맡다가 조선영화건설본부가 조선영화동맹으로 결합한 뒤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영화인들이 결집하였던 영화감독 구락부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 시기 중앙일보사 고문, 민주일보사 편집위원과 문화부장으로 재직하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사단법인 대한영화사 전무이사, 대한영화협회 이사장, 서울시 예술원 문화위원을 역임하였다.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 3·1절 기념 어린이 노래극 「우리의 소원은 독립」에서 주제가인 「우리의 소원」을 작사하였다. 1950년 2월 24일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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