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는 일제강점기 「적의 비곡」·「과거의 왕국」·『회월시초』 등을 저술한 시인. 소설가·문학평론가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신청년』, 『장미촌』, 『백조』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4년 신경향파 문학단체 파스큘라(PASKYULA) 결성과 1925년 카프(KAPF) 결성에 참여했다. 1934년 《동아일보》에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을 발표해 카프 탈퇴와 전향을 선언했다. 저서로는 『소설 평론집』(1930), 평론집 『문학의 이론과 실제』(1947) 등이 있다.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01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16년 공옥소학교(攻玉小學校)를 졸업, 같은 해 4월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 나도향(羅稻香) · 김기진(金基鎭) · 김복진(金復鎭)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1919년 3월 5일 만세운동에 참가해, 체포되었으나 훈계 방면되기도 했다. 1920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수학했다.
1921년 귀국해 종합교양지 『신청년(新靑年)』과 한국 최초의 시 전문지 『장미촌(薔薇村)』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장미촌』 창간호에는 시 「적(笛)의 비곡」, 「과거의 왕국」을 발표했다. 1922년 1월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문학을 소개한 잡지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창간호에 「미소의 허화시(虛華詩)」 등 7편의 시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희곡 「루 살로메(Lou Salome)」를 번역해 실었다. 1924년 4월에는 개벽사(開闢社)에서 학예부장을 맡았으며, 같은 해 10월 신경향파 문학단체 파스큘라(PASKYULA)를 결성하였다.
1925년 8월에는 카프(KAPF) 결성에 참가해 교양부 책임자를 맡았다.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되며 제1차 카프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경성지부 해소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1932년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났다. 1934년 1월 2일자 『동아일보』에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을 발표해 카프 탈퇴와 전향을 선언했다. 1934년 12월 제2차 카프 검거사건인 신건설사(新建設社)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됐으나 1936년 12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1937년 시집 『회월시초(懷月詩抄)』를 발간했다. 1936년 12월 공포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朝鮮思想犯保護觀察令)」에 의해 조선사상범보호관찰소에 수용되었다. 1938년 6월 전향자를 국민정신총동원에 적극 참여시키기 위해 열린 시국대응전국위원회에 조선인 대표위원으로 참석하였다. 같은 달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결성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그가 각색한 방첩영화 『군용열차』가 개봉되었다. 같은 해 7월 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간사, 상임간사, 후생부 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9월 조선방공협회 평의원이 되었다.
1939년 3월 황군위문작가단(皇軍慰問作家團) 실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9∼10월 중국에 다녀와 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에 「전선기행」을 발표하였다. 1940년 5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촉탁으로 기관지 『총동원』 편집에 관여했고, 12월 황도학회의 이사 겸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매일신보』에 1940년 1월 「국민 문학의 건설」, 4월 「문장보국의 의의」, 8월 「지식인의 윤리」 등을 기고했으며, 1941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3월 그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지원병 선전 영화인 『지원병』이 개봉했고, 8월 임전대책협력회,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10월 평의원 등을 맡았다.
1942년 2월 싱가포르 함락 소식을 듣고 『매일신보』에 「감격에서 창조로」를 기고했으며, 9월 조선문인협회 간사장에 재선임 되었다. 같은 해 11월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 조선 문인 대표, 12월 대동아전(大東亞戰)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 강연 등의 활동을 했다. 1943년 2월 국어문예작품 총독상 전형위원, 4월 조선문인보국단 총무부장이 되었고, 10월 조선문인보국회 주최 결전 소설 및 희곡 모집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1945년 8월 조선문인보국회 평론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각종 단체에 참여하여 활발하게 친일활동을 벌였으며, 문필활동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친일성향을 드러내어 다수의 친일 관련 글들을 남겼다.
해방 이후 1945년 12월 춘천공립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46년 12월 사직했고, 1948년 3월부터 서울대학교, 국민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에서 강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1930년 소설과 평론을 묶은 『소설 · 평론집』, 1937년 시집 『회월시초』, 1947년 평론집 『문학의 이론과 실제』 등이 있고, 1958년 4월부터 1959년 4월까지 해방 후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현대한국문학사」가 『사상계(思想界)』에 연재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해 납북되었다.
박영희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 · 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663∼749)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