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함경남도 홍원(洪原)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1931년 3월 함경남도 삼호공립보통학교(三湖公立普通學校)를, 1936년 3월 함흥공립농업학교(咸興公立農業學校)를 졸업하였다. 그 뒤 일본에 건너가 1936년 4월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영문과에 입학해 1939년 3월 졸업하였다. 1939년 4월 일본 릿교대학[立敎大學] 경제학과에 입학해 1941년 졸업하였다. 릿교대학 재학 중 『매일신보』 1940년 9월 8일자 「경제의 이론과 윤리」, 9월 15일자 「학생과 정치」, 11월 3일자 「현대인의 과제」, 11월 24일자 「신청년(新靑年)의 방향」, 12월 22일자 「시대의 이념」, 1941년 2월 9일자 「경제와 인생」 등을 기고하였다.
졸업 후에도 『매일신보』1942년 1월 14일자부터 6회에 걸쳐 「국민 최저생활의 제문제」, 같은 해 10월 13일자부터 3회에 걸쳐 「대동아건설의 윤리」를 기고하였다. 대부분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전시체제하 일제의 통제경제정책을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1942년 3월부터 1943년 7월까지 야마자키[山崎] 경제연구소 연구원, 1943년 8월부터 1945년 5월까지 도요[東洋] 경제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매일신보』 1943년 8월 6일자에는 언론보국회(言論報國會) 서기의 직함으로 「문화인의 감격과 기쁨」, 1945년 3월 5일자부터 3회에 걸쳐 「생활과 전력(戰力)」 등을 기고하였으며, 이외에도 『춘추』 1943년 2월호에 「전시생활과 과제」, 3월호에 「전시경제의 과제」,『조광』 1943년 9월호에 「식량과 국가관리」 등을 발표하였다. 이 글들은 대부분 전시체제기 일제의 통제경제정책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해방 후 1945년 9월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었고, 1948년 5월 『경제학입문』을출간하였다. 1952년 한국경제학회 이사,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5년 2월 『경제학』을출간하였으며, 1956년 3월 고려대학교 교수를 거쳐 같은 해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1970년에는 『한국금융사연구』를 출간하였다. 1973년 4월부터 1977년 4월까지 한국개발연구원(KDI) 이사 겸 이사장, 1976년 12월부터 1981년 1월까지 한국경제학회 이사를 지냈으며, 1979년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장, 1980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자문위원, 1981년 1월부터 1983년 3월까지 한국경제학회장을 지냈다. 1982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추진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의 주요 연구 분야는 한국경제사로, 1966년 「아시아에서 산업 발전의 단계」를 발표해 아시아 각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개항의 동기·시차 및 그 이후 발전 격차를 비교·규명하였고, 한말 이후 근현대 한국사회의 경제 현실과 역사에 관한 구조분석을 진행하며, “한국 경제학의 텃밭을 일군 경제학계의 1세대”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치와 경제(역)』(1954), 『현대경제론』(1954), 『한국경제론』(1956), 『신경제학(역)』(1958), 『근세한국산업사연구』(1959), 『식민지금융정책의사적분석』(1972), 『한국이민사연구』(1973), 『한국경영사연구』(1975), 『한국근대화론』(1976), 『한국촌락사회사연구』(1977), 『경제학자의 회고』(1979), 『인생잡기』(1985), 『수상(隨想) 한국인』(1985), 『한국사회경제사론』(1988), 『끝없는 도전』(1991), 『마거릿 대처』(1994), 『다산을 찾아서』(1995) 등 60여 권에 달하는 저서가 있다. 1969년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수상하였으며, 1970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이외에도 청조근정훈장, 다산경제학상, 서울특별시문화상 학술부문, 세종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1995년 12월 1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