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경기도 강화에서 출생했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가 1931년 캐랫신학교를 마친 뒤 노스웨스트대학원을 거쳐 1934년 시카고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교수직을 상실했으나, 1938년 대동민우회에 입회한다는 전향 성명서를 내고 교수직에 복직했다. 1943년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연성국장 겸 상임위원에 임명되었고, 학병 권유 활동 등을 위해 조직된 종교연합단체인 조선종교단체전시보국회에 감리교를 대표하여 위원을 맡았다. 1945년 일본기독교 조선교교단의 종교교육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해방 후 1948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하다가 정부 수립 후 초대 공보실장에 임명되었다. 1951년 한일회담 대표, 1952년 외무부차관, 1953년 공보처장, 1955년 공보실장을 지냈다. 이어 1956년 대한농구협회장, 1957년 동명학원(東明學園) 이사장을 맡았다. 1966년부터 말레이시아 대사로 일했으며, 1971년 외무부 대기대사를 지냈으며, 1973년 아스팍사회문화센터 사무국장을 맡은 뒤 미국으로 건너가 만년을 보냈다. 상훈으로는 말레이지아 탄스리훈장을 받았다. 1989년 8월 25일 사망했다.
갈홍기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5∼5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