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이른바 ‘문화정치’하에서 러시아혁명 이후 세계적으로 고양된 프롤레타리아의 파고를 배경으로 조선에서도 공산주의운동이 발흥하였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고양 속에서 KAPF는 소련의 RAPP와 일본의 NAPF에 영향을 받아 프롤레타리아계급운동의 일환으로 문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초 일본에서 신사상의 세례를 받은 유학생 김기진(金基鎭)을 비롯한 박영희(朴英熙) · 이상화(李相和) 등에 의하여 예술지상주의를 반대하는 ‘생활을 위한 예술’이 소박하게 주장되었으나, 아직 관념적이고 심정적인 감정토로에 지나지 않았다.
1922년 9월경에 조직된 염군사(焰群社 : 무산계급 해방문화의 연구 및 운동을 목적으로 하여 李浩 · 李赤曉 · 金斗洙 · 崔承一 · 朴容大 · 金永八 · 宋影 · 沈大燮 · 金紅波 등에 의하여 구성)와 문학가단체 ‘파스큘라’(PASKYULA : 김기진 · 박영희 · 金復鎭 · 金炯元 · 安夕影 · 李益相 · 延鶴年 · 이상화 등의 두음자를 따서 명명)가 당시 국내 사회주의운동단체와 관련하여, 그리고 일본 프로문학의 영향 아래 KAPF로 통합된 것은 1925년 8월경이었다.
KAPF 결성 뒤에도 두드러진 창작 활동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주로 평론을 통한 정론적 예술비평이 주조를 이루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박영희 · 김기진 · 최서해(崔曙海) 등의 단편소설이 있으며, 준기관지 ≪문예운동 文藝運動≫(1926)을 발간하여 그들의 이념을 전파하였다.
한편, 1926년 말부터 KAPF 내부에서 계급성을 강조하는 박영희와 형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김기진 사이에서 ‘내용 · 형식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 논쟁은 결국 김기진이 자신의 설을 철회하는 것으로 끝났고 이를 계기로 KAPF의 제1차 방향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논쟁의 과정 속에는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가 미묘하게 개입되고 있었다. 1927년 말 KAPF 동경지부는 기관지 ≪예술운동 藝術運動≫을 발간하고, 서울의 중앙과 갈등관계를 심화시켰다.
그리하여 제3차 조선공산당(ML)과 관련된 ≪무산자사 無産者社≫를 통하여 1929년경부터 신진이론가들의 계급문예이론이 KAPF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임화(林和) · 김남천(金南天) 등 소장파들은 당시 사회운동의 조류에 발맞추어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주장하고, ‘소부르주아적 편향을 척결할’ 목적으로 카프의 재조직을 단행하였다. 이것이 1930년 KAPF의 제2차 방향전환이다.
방향전환 이후 예술대중화론에 대한 내부 논쟁이 벌어지고 창작방법론 문제로 심화되었으며,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용 문제도 적극적으로 거론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러서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작품들이 산출된다. 이는 여러 논의를 통하여 리얼리즘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었고, 작가들이 창작을 통하여 사회적 실천을 하려는 노력들이 활발하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KAPF의 활동은 영화 <지하촌 地下村> 사건으로 1931년 1차검거, 1934년 신건설사(新建設社)사건으로 2차검거를 통한 극심한 탄압으로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지속적인 일제의 탄압과 조직 내부의 갈등으로 인한 조직원들의 전향이 계기가 되어 1935년 5월 KAPF는 공식적으로 해체선언을 하게 된다.
조직 내부에서는 해체에 찬성하는 ‘해소파’와 이에 반대하는 ‘비해소파’의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났으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임화 등에 의하여 결국은 KAPF가 해체된 것이다.
양측의 대립은 광복 이후에 또다시 첨예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카프의 해체 이후에도 프로문학의 이론과 창작은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말에는 대부분 전향을 하거나 침묵으로 자신들의 이념을 고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제의 학정하에서 사회주의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문학운동은 기나긴 잠복기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하활동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함으로써 새로운 단계로 부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