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1938년 6월에 총독부가 종용하여 민간 사회교화단체 대표자들이 자발적인 총후봉사활동을 내세우며 조직한 친일단체이다. 중일전쟁 이후 애국운동으로 인한 무질서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하였다. 59개 단체 및 개인 56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발회식에는 조선총독과 군사령관 등 유력자들과 700여 단체가 참여하였고 3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실천강령으로 황국정신 현양, 내선일체 완성 등을 제시하였다. 지역에 도(道), 부, 군, 도(島)연맹을 결성하여 총독부의 정책에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이른바 애국운동, 특히 화북장병 위문행이 유행처럼 되어, 더러는 현지군에 지장을 주기도 하였다. 이에 조선총독 미나미[齋藤實]는 화북 위문행을 삼가라는 취지의 담화문을 발표했고, 이후 이러한 무질서 상태를 해결할 목적으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결성되었다.
종으로는 각 종교단체와 사회교화단체의 간부, 횡으로는 2천 3백만 민중 전체를 연맹원으로 하는 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1938년 6월 22일 부민관에서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59개 단체 및 개인 56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총회에 참가한 발기인들은 취지와 규약을 정하고 한상룡 외 6명의 이사 전형위원, 박영철 등 13명의 창립총회 준비위원을 선정하였다.
이어서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 1주년이 되는 날을 택해 경성운동장에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성대한 발회식이 거행되었다. 식전에는 조선총독 미나미, 조선군사령관 고이소[小磯國昭], 정무총감 오노[大野綠一郞] 등 군관민 유력자들과 7백여 단체, 개인 3만 명이 식장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시오바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 이사장의 식사와 미나미의 고사(告辭), 대회선언문과 황군 위문문 및 관계 요로에 보낼 전보문 채택, 고이소 등의 축사 외 윤치호가 선창한 천황폐하 만세 3창으로 식순을 마쳤다. 그리고 두 패로 나누어 부청 앞과 총독부 앞으로 향하는 애국시가행진을 하였다.
이날 채택된 대회 선언문은 “동양 평화를 확보하여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정신을 세계에 앙양함은 제국 부동의 국시이다. 우리는 이에 일치단결하여 국민정신을 총동원하여 내선일체 전 능력을 발양하여 국책의 수행에 협력하여 성전 궁극의 목적을 관철”한다는 취지였다.
한편 총독부의 학무국은 중앙조직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결성에 따르는 지역조직, 즉 각도(道), 부, 군, 도(島)연맹 결성을 위해 1938년 7월 19일 각도 교화사무 담당자 협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직에 관한 건을 중심으로 근로보국운동 전개, 청년훈련소 확충 건 등이 협의되었다. 또한 황국신민의 서언을 철저히 보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3도 방방곡곡에 지역연맹이 조직되었다.
이렇게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크게는 도, 작게는 정(町)연맹과 애국반에까지 조직 침투함으로써 국책 협력을 선동하는 중심적이며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지원병 독려는 물론 창씨개명 독려, 공출과 현금 독려, 폐품 수집, 일본어 강습회 등,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활동이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구체적으로 제시한 실천강령을 보면, ① 황국정신 현양 ② 내선 일체 완성 ③ 비상시 국민생활 혁신 ④ 전시 경제정책 혐력 ⑤ 근로 보국 ⑥ 생업 보국 ⑦ 총후 후원, 즉 군인원호 강화 ⑧ 방공(防空) 방첩 ⑨ 실천망의 조직과 지도의 철저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단체는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기구를 개편하고 재출발하였다. 총력운동과 애국운동의 총본산이었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아껴쓰기 曉』, 『애국반』, 『총동원』 같은 기관지와 선전책자를 발간하고 정단위로 배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