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지역의 주요 한인신문의 역사는 한말의『해조신문』(1908)으로부터 시작하여,『대동공보』(1908∼1910),『대동신보』(1911),『대양보』(1911)『권업신문』(1912∼1914),『한인신보』(1917∼1918),『청구신보』·『한족공보』(1917·1918) 등 민족주의 성향의 신문에 이어, 1923년 이후 소비에트언론으로 등장한『선봉』(1923∼1937), 『레닌의 긔치』·『레닌의 기치』·『레닌기치』(1938∼1990)에 이르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선봉 간행 이전 1922년 8월 19일 러시아공산당연해주연합회내 고려부의 기관지로 『붉은 긔』가 창간되었으나 14호까지만 발행되었다. 1923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창간된 『三月一日』은 1주 2회 발행 예정으로 창간되었다. 그러나 4호부터『선봉』으로 신문의 명칭이 개칭되어 1937년까지 간행되었다.
책임주필은 이백초를 필두로 하여 이성, 오성묵, 이괄, 김진, 최호림, 박동희, 남창원, 황동훈, 김홍집, 윤세환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 외에도 김하구가 총무, 김철·계봉우 등이 번역원으로 활약하였다.
한문을 괄호 속에 넣은 형태이며 등사판으로 인쇄하였다. 1922년 창간 당시는 1년에 14호를 80부씩 발행하였으나, 1935년에 이르면 격일간으로 바뀌고 1만부를 발행하게 되었다.
창간 후 1924년 6월까지는 조선혁명의 민족적 협동전선을 촉성을 구호로 내세웠으나 1924년 6월부터 1937년 9월 폐간될 때까지는 계급의식의 고취, 공산주의적 교양, 사회주의 건설에 대한 홍보, 소비에트의 혁명적 모범과 세계의 혁명적 소식 전달 등에 주력하였다.
조선혁명의 민족적 협동전선을 촉성시킬 것으로 초기 사업목표로 내세웠던 선봉은 1930년대 이르면 집단적 선전자·선동자만이 아니라 집단적 조직자로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1937년 여름 강제이주 직전 스탈린 대탄압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선봉에 개입하였다. 선봉의 주도인물 교체와 함께 1930년대 중반 이후 한인사회는 선봉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었던 대중적·집단적 테러문화를 주도하였다. 이러한 한인사회의 집단적 정치문화는 수천명에 달하는 한인지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처형을 아무런 저항없이 침묵속에 진행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한인사회 전체에 대한 강압적·집단적 강제이주가 가능했던 조건을 형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