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일제가 문화정치에서 허용하고 제시하였던 사회운동의 방안은 문화운동이었다. 문화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구체적인 강령으로 일제는 ‘참정권 획득 청원’, ‘실력양성’, ‘민족성 개조’의 세 가지를 내세웠다. 이 내용은 친일파, 예속자본가에게 뿐만 아니라 민족개량주의자에게도 획기적인 환영을 받았다. 1920년대 일제의 문화정치 아래에서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먼저 민족성 개조를 추진하였는데, 민족개조론이 그 정신적·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그들은 다음 단계로서 일제가 허용한 실력양성운동, 참정권 획득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궁극적으로 독립을 포기한 일제지배 안에서의 자치를 주장하였다.
민족개조론을 쓰기에 앞서 이광수는 「중추계급과 사회」(『개벽』1921.7), 「소년에게」(『개벽』1921.11∼1922.3)를 발표하였다. 두 글은 사회개조를 다루는 논문이었으나 사실은 민족의식 개조론의 일환이었다. 이광수는 「중추계급과 사회」에서 한 민족의 중심이 될 중추계급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선 적당한 인물을 찾아 수양(修養)동맹과 수학(修學)동맹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이는 귀국 후, 이광수의 첫 목표가 동우회 조직에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소년에게」라는 장편의 논설은 소년의 노력과 성의에 의해 민족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논지였다. 여기서도 이광수는 소년동맹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밖에도 「상쟁(相爭)의 세계에서 상애(相愛)의 세계로」 등 민족개조론에 이르는 다수의 논설들을『개벽』에 발표하고 난 뒤, 드디어 『개벽』1922년 5월호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민족개조론은『개벽(開闢)』1922년 5월호에 발표되었다. 민족개조론은 상·중·하로 구성된 장편 논문이며 글머리에는 변언(辯言), 끝에는 결론이 붙어 있다. 민족개조론 상(上)에서 이광수는 민족개조의 원리, 역사상으로 본 민족개조 운동, 갑신이래의 조선의 개조 운동을, 중(中)에서는 민족 개조는 도덕적일 것, 민족성의 개조는 가능한가, 민족성의 개조는 얼마나한 시간을 요할까, 하(下)에서는 개조의 내용, 개조의 방법을 다루고 있다.
민족개조론의 핵심은 하(下)의 내용을 보면, 첫째, 각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말과 속이는 행실 없애기. 둘째, 공상과 공론은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 의무라고 생각하는 바를 부지런히 실행하기. 셋째, 표리부동과 반복함이 없이 의리와 허락을 철석같이 지키는 충성되는 신의 있는 자가 되기. 넷째, 고식, 준수 등의 겁나(怯懦)를 버리기. 다섯째, 개인보다 단체를, 즉 사보다 공을 중히 여겨, 사회에 대한 봉사를 생명으로 알기(이상 덕육(德育)방면). 여섯째, 보통 상식을 가지고 일종 이상의 전문 학술이나 기예를 배워 반드시 일종 이상의 직업을 가지기(이상 지육(智育)방면). 일곱째, 근검 저축을 상(尙)하여 생활의 경제적 독립을 가지기(이상 경제방면)였고, 이 밖에 청결, 운동 등 덕·체·지의 3육(三育)과 부의 축적, 사회 봉사심의 함양 등을 개조의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발표되자마자 민족개조론은 지사적 계층과 청년들의 맹렬한 비난과 분노에 직면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독립을 외면한 개조의 방법론이 갖는 허구성이 청년층의 분노를 유발하였다. 둘째, 개조론이 재외동포 중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은 투쟁론을 주장하던 해외 망명객들을 심하게 모독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셋째, 3·1 운동 참가자를 무지몽매한 야만인이라고 하여 3·1 운동을 비하한 모멸적 발언이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3·1 운동 이후 1920년대 중반에 오면 국내의 민족운동이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크게 양분되며 이를 통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1927년 신간회 조직으로 나타났다. 좌우익 이데올로기가 일종의 대립의식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초입단계에서 하나의 쐐기 같은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민족개조론이었다. 민족개조론에 이어서 2년 후 동아일보에 발표한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은 정치·교육·산업의 3대 결사를 설립한다는 명목하에 직접적으로 자치론으로 방향을 전환한 기폭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