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개량주의는 정치적으로 투쟁을 통한 독립보다는 탈정치적 자립을 강조한다. 사회사상의 측면에서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를 풍미하는 부르조아지의 경제적 합리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역설한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서구 중심적 근대의 문화관념이 민족적 전통의 문화관념을 대체한다. 세계사적 차원에서 식민지의 근대는 결과적으로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사회발전 모델을 추구한다. 이 점에서 그것은 이미 민족주의와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다.
사회적 총관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민족개량주의는 식민지의 중층적 경제제도에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에 자신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계급의 입장을 대변한다. 즉 식민지 부르조아지의 사회발전전략이 식민지라는 특수상황에서 굴절되어 나타난 이데올로기가 민족개량주의의 실체이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민족개량주의의 주체를 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분류한다.
민족개량주의에 관한 우리 학계의 논의는 북한의 민족개량주의 논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198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북한학계는 1960년대 후반 허장만과 김희일을 중심으로 민족개량주의에 관한 논쟁을 진행하였는데, 허장만은 민족주의에 민족개량주의를 포함하여 이해한 반면, 김희일은 민족주의와 민족개량주의를 구분하였다. 한편 민족개량주의와 민족주의의 물적토대를 허장만은 민족부르조아지의 상층과 중 · 하층에서, 김희일은 예속자본과 민족자본에서 찾았다. 또한 민족개량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정책으로 허장만은 전자에 대해서는 전략적 고립화, 후자에 대해서는 전량적 동맹의 구분으로, 김희일은 전자에 대해서는 타도의 대상, 후자에 대해서는 전략적 동맹의 관계를 취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민족주의와 민족개량주의를 바라보는 우리나라 학계의 입장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민족자본의 개념과 실재를 부정하며 민족주의를 부르조아지의 사상이라는 점만 강조하고, 그 역사적 지위와 역할에 대하여 전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의견이 있다. 이 경우 민족주의와 민족개량주의의 구분은 그 필요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민족주의의 의미를 부인하지 않지만, 민족주의의 양면성 중 그 한계점에 편중하여 취급하고, 민족개량주의와 민족주의의 경계선이 불투명한 의견이 있다. 이 경우는 민족개량주의를 당연히 민족주의의 본성적 산물로만 취급한다.
셋째, 식민지에서 민족주의의 의의를 강조하여 민족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취급하는 의견이 있다. 이 경우 민족개량주의는 당연히 민족주의가 아닌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경우는 민족주의와 민족개량주의의 바탕에 있는 공통성과 유사성까지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1905년 이후 국권회복을 목표로 제기되었던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던 집단은 지배층, 지주층으로서 대한제국의 관료층, 개신유학자, 일본 유학생 출신의 신지식층 등이다. 이 운동의 중심은 민중층에 대한 계몽이었으며 영웅주의, 국가주의, 애국주의 등을 강조하는 교육이 핵심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의 또 다른 영역은 식산흥업(殖産興業)이었다. 교육과 식산이라는 운동영역은 장기간에 걸쳐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현실의 정치적인 문제를 외면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계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합방을 전후하여 실력양성론 · 준비론을 계속 견지하던 집단과 이러한 논의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무장항쟁노선을 추구하던 집단으로 갈리게 되었다.
전자는 일제에 대한 대응에 따라 다시 두 집단으로 나뉘어졌다. 그 하나는 1910년 이후 일제의 지주제 보호에 편승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일제에 예속화한 집단이었다.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속성상 일제의 경제침탈, 자본침탈에 일정하게 대립하는 측면을 지니면서도 일제의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산업의 발전, 교육의 진흥, 참정권론, 자치론 등의 문화운동을 통하여 개량적인 형태의 부르주아 민족운동을 추진한 집단이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식민정책으로 소위 문화정책을 표방하며 민족분열을 시도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민족 부르조아지들은 세 갈래로 나뉘어졌다. 첫째, 예속적 부르조아지의 친일활동 둘째, 국외를 중심으로 한 독립전쟁론, 마지막으로 독립준비론 · 실력양성론 · 외교독립론 등을 주장한 민족개량주의였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먼저 경제분야에서의 실력양성으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실력양성을 위한 다음의 과제는 교육의 진흥이었다. 이것은 민립대학설립운동으로 나타났다. 참정권 획득 청원은 자치운동으로 발전되었다. 결론적으로 종속적 발전을 지향하였던 민족개량주의는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에 예속화될 수 밖에 없었다.
민족개량주의는 식민지배정책의 일환으로 일제에 의해서 조장되었다. 일제는 3.1 운동 이후 동요하고 있던 민족 부르조아지에 대해 문화운동을 미끼로 회유공작을 펴서 민족분열을 획책하였다. 일제는 이광수 등을 통해 민족개량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최린 등을 앞세워 민족주의 진영을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포섭공작은 조선인경제회, 수양동맹회, 민우회 등을 통해 민족주의자를 유인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이들 단체는 실력양성을 명분으로 내세운 강연회 등을 열어 문화운동이 민족개량주의자에 의해 지도되는 것처럼 위장해 일반대중은 물론 민족개량주의자에게 일종의 환상을 심어 주었다.
민족개량주의자들은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그 내부에서의 종속적 발전을 근대화, 자본주의화라고 여기고 이를 기꺼이 선택하였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식민지배의 파쇼화와 대륙침략의 과정에서 그들은 예속화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