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철 ()

법제·행정
인물
일제강점기 군부대신 관방 부관,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다산(多山)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9년(고종 16) 2월 2일
사망 연도
1939년 3월 10일
본관
충주(忠州)
출생지
전라북도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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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군부대신 관방 부관,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본관은 충주(忠州). 호는 다산(多山).

생애 및 활동사항

대한제국 학부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세이죠학교[成城學校]를 다닌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903년 말에 졸업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에 종군하였고, 육군 기병 참위와 육군무관학교 교원 · 교관을 지낸 후 대한제국 군대로 복귀하였으며, 이 해 10월부터 12월 초까지 특명전권공사 이재극을 수행하여 일본 군사시설 등을 시찰하였다. 또한 이 해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육군 기병의 부관 · 정위 · 참령, 육군유년학교 부관, 군부의 교무과원 · 기병과원, 경성 위수사령부 참모관 등을 지냈다.

1907년 시위혼성여단 참강관, 군부대신 관방 부관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1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한국황태자전하가례기념장, 8월 한국황제폐하즉위기념장, 11월 훈5등 태극장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 10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08년 2월 일본 정부로부터 러일전쟁 참전기념장과 하사금을 받았고, 6월부터 일제의 한국주차헌병대에 파견되어 정계 동향 파악, 정보 수집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1909년 5월 일본 정부로부터 황태자도한기념장(皇太子渡韓記念章)을 받았고, 1910년 2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한국황제폐하서남순행기념장을 받았다.

국권 피탈 이후 1910년 10월 일본 정부가 주는 1,000원을 받았으며, 1911년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 기병참령으로 배속되었다. 1912년 전역한 후 8월 전라북도 익산군수로 임명되었고,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1915년 11월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자 1916년 전북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18년 함경북도 참여관으로 발령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4월 30일자에 “성산(成算) 없는 독립운동은 생명과 재산의 손실만 초래하고 설사 일본이 독립을 승인할지라도 조선인에게는 나라를 지탱할 능력이 없다”는 글을 실어 독립운동 방해에 협력하였다. 이 해 12월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21년 전라북도 참여관, 1925년 강원도지사로 임명되었다. 1926년 함경북도지사가 되었고, 같은 해 6월에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27년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삼남은행 두취(頭取, 은행장), 동민회(同民會) 부회장, 산림수탈정책 협력단체인 조선산림회 이사, 경성상공회의소 특별위원을 맡았다.

1928년 조선상업은행 부두취(副頭取, 부은행장)가 되었고, ‘조선인의 교화 선도’를 내세운 조선불교단 이사, 경성협찬회를 발의한 후 평의원 및 상담역 등을 맡았다. 이 해 9월 일본적십자사 유공장, 11월 쇼와대례기념장(昭和大禮記念章)을 받았다. 1929년 조선박람회 평의원 · 이사, 조선사회사업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일제의 식민정책을 대변하였던 경성방송국 이사,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취체역(取締役, 중역 또는 이사), 1931년 조선상업은행 은행장, 전선시국대회 선전계, 경성부 교육회 부회장과 단군신전봉찬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이봉창 의거가 일어나자 중추원 참의 김명준(金明濬) · 신석린(申錫麟) · 한상룡(韓相龍)과 함께 일본 내각의 주요 인사를 비롯하여 조선총독부 · 조선군사령부에 사죄의 뜻을 전달하고 며칠 동안 근신하였다. 또한 조선간이생명보험사업자문위원회 위원, 조선철도주식회사와 조선신탁주식회사의 취체역을 맡았다. 1933년 6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가 되어 사망할 때까지 역임하였다. 또한 1933년 임시조선미곡조사위원회 위원, 중추원 시정연구회 경제부 위원, 조선맥주주식회사 취체역,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설립위원, 조선신궁봉찬회 평의원 ·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에는 일본 황도(皇道) 사상단체인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 경기도 국방의회연합회 부회장과 조선국방의회연합회 상임이사, 조선농회 특별의원, ‘일본 민족과 일치 합작’을 주장하던 시중회(時中會) 이사를 맡았다. 1935년 북선제지화학공업주식회사 감사, ‘사상범을 선도’하기 위해 경기도청에서 조직한 소도회(昭道會) 부회장 등을 맡았고, 이 해 10월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을 받았다. 1936년 조선수산회 부회장, 조선미술전람회 평의원, 선만척식회사 설립위원, 조선산업경제조사회 위원과 치수조사위원 등을 맡았다. 1937년 경성 주재 만주국 초대 명예 총영사과 조선중공업회사 취체역 등을 맡았고, 조선총독부에 국방헌금 1만원을 냈으며, 경기도군용기헌납기성회를 발의한 후 모금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임시교육심의위원회와 남경함락전첩봉고제(南京陷落戰捷奉告祭)의 위원을 맡았고, ‘황군위문가(皇軍慰問歌)’를 적은 카드 5만 매를 만들어 일본군에 배포하였으며, 순회시국강연회도 개최하였다.

1938년 조선총독부의 저축장려위원회 · 시국대책조사회 위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준비위원 · 발기인 · 이사,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 독립운동가의 전향을 유도하기 위해 조직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총무 등을 맡았다. 또한 경성부를 찾아 각종 금붙이를 헌납하였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순회강연반의 연사로 경기도 · 강원도 · 함경북도 · 충청북도를 순회하였다. 1939년 경성부 육군병지원자후원회 이사,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실행위원 및 발기인, 한강수력전기회사 취체역으로 활동하였다. 이 해 3월 10일 사망하자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중수장(旭日中綬章), 만주국으로부터 훈3위 경운장(景雲章)이 추서(追敍)되었고, 일본 궁중으로부터 폐백(幣帛)과 제전(祭奠)이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재산국가귀속결정문(친일재산조사위원회 백서 3)』 1(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서광인쇄공사, 2010)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6(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국사편찬위원회 신문잡지DB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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