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웅렬은 대한제국기 군부대신, 중추원찬의, 군부찬모관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40년 충남 아산 출생으로 1856년(철종 7) 무과에 합격하였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동행해 일본의 조야 인사와 교유하였다. 1896년 전라남도 관찰사로, 1899년 군부대신으로 발령받았다. 1905년 중추원 찬의·군부 찬모관에 임명되었고, 사립 강화육영학교와 국민교육회에 찬성금 100원씩을 기부하였다. 1910년 10월 한일합병에 대한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았고, 이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본관은 해평(海平). 충청남도 아산 출신. 자는 영중(英仲), 호는 반계(磻溪)이다. 윤치호(尹致昊)의 아버지이다.
1856년(철종 7) 무과에 합격하였고, 1861년 충청도 감영중군 겸 공주중군, 1862년 함경북도 병마우후 겸 토포사로 임명되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동행하여 도쿄에서 흥아회 모임에 참석하였고, 일본의 조야인사와 교유하였다. 1881년 조선 최초의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조직·운영하는 데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통리기무아문사·남양부사로 임명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이승모를 일본 공관에 보내 군민들이 공관을 습격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일본 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에게 통보하여 자위책을 강구하도록 요청하였다. 군민들의 공격이 시작되자 일본 공사 일행과 나가사키(長崎)로 피신하였고, 정국이 안정되자 귀국하여 개화당 조직에 참여하였다. 또한 그 해 별군직과 병조 첨지로 임명되었다. 1883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가 파직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개혁이 단행될 때 형조판서·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1886년 4월부터 1894년 6월까지 신기선(申箕善) 일파로 몰려 탄핵을 받고 능주(현재의 화순)로 유배되었다. 1895년 경상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고, ‘춘생문사건’에 가담하였으나 사건이 실패하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896년 귀국한 뒤 전라남도 관찰사로 발령 받았고 전라남도재판소 판사를 겸하였다. 또한 이 해부터 수년에 걸쳐 중추원 의관을 맡았다. 1898년 내부협판·서리대신사무·귀족원경으로 발령 받았고, 법부협판으로 고등재판소 재판장을 겸임하였다. 또한 이 해부터 수년에 걸쳐 의정부 찬정으로 임명되었다. 1899년 군부대신으로 발령 받았고, 이 해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다.
1900년 전라남도 관찰사, 1902년 중추원의관·임시서리로 발령 받았다. 1903년 임시서리 군부대신 사무·원수부 기록국 총장·군부대신·육군부장·원수부 검사국 총장 등에 임명되었다. 1904년 군부대신·임시서리 내장원경 사무·임시서리 농상공부 대신사무·참모부부장 등으로 발령 받았다.
1905년 중추원 찬의·군부 찬모관에 임명되었고, 사립 강화육영학교와 국민교육회에 찬성금 100원씩을 기부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을 맡았고, 한성부에 있는 상업전문학교 교장으로 선정되었으며, 군대 해산으로 육군부장에서 해임되어 전역하였다. 1908년 3월 ‘대일본(제국)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 부장과 기호흥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보상금 중 3만원을 영국인 베델(Ernest Bethell)이 사취하였으므로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하고서 소장직에서 물러났다. 1909년 일본관광단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국권 피탈 직후인 1910년 8월 말 본가에서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노비문권을 불태웠다. 같은 해 12월 윤웅렬·양기탁 등이 보관 중이던 국채보상금 4만 2천여 원이 통감부와 경무총감부에 강제로 이관되었다.
1910년 10월 7일 ‘한일합병’에 대한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11년 1월 13일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1년 10월 사망하자 1912년 1월 15일 아들 윤치호가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윤치호는 ‘1911년 105인 사건 주모자로 실형 선고된 것’을 사유로 1912년 5월 22일 남작의 예우가 정지되었고, 1913년 10월 9일 그 작위를 상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