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대시(大始). 경기도 광주 출생이다.
1855년(철종 6) 진사에 합격하였고, 1864년(고종 1) 증광시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 부교리로 관직에 나아갔다. 1865년 김제군수로 임명되어 1866년 고을을 잘 다스리는 수령으로 국새를 찍은 유서와 함께 관복을 하사받았다. 1873년 좌승지·성균관 대사성, 1877년 이조참의, 1879년 도총부 부총관·동지돈녕부사·예조참판으로 임명되었다. 1882년 『선원보략』을 수정할 때 국조어첩서사관을 맡았다.
1886년 이조참판·병조참판, 1887년 한성부 우윤, 1888년 형조참판으로 임명되었고, 1889년 예조참판·공조판서을 맡았다. 1890년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되었고, 1892년부터 1893년 봄까지 청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다녀왔다.
1893년 귀국 후 공조판서·형조판서·의정부 좌참찬을 맡았고, 1896년 공주부관찰사 겸 공주재판소 판사, 충청남도 관찰사 겸 충청남도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1898년 중추원 의관·시종원경·태의원경을 맡았다. 1899년 비서원경·내부대신·학부대신을 맡았다. 내부대신으로 재직할 때 울릉도 개척을 위해 시찰위원을 파견해 호구와 토지의 개간 정도를 조사하고 주민 안정 도모에 힘썼다.
1900년 법규교정소 의정관, 1901년 임시서리 농상공부 대신·혜민원 총재·규장각 학사를 맡았다. 1902년 양지아문 총재관을 맡았다. 1904년 판돈녕원사·시종원경·임시서리 학부대신 사무를 지냈다. 이 해 일본 정부가 황무지개척권위임계약안을 제시하고 전국토의 3할이나 되는 황무지 개척권을 50년간 양도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때 이건하는 박기양(朴箕陽)·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반대 상소를 올리고 규탄 선언서를 발표해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확보를 저지하였다.
1905년 홍문관 학사를 거쳐 충청남도 관찰사·중추원 부의장·중추원 찬의 등에 임명되었고, 훈2등 팔괘장을 받았다. 또한 1910년 을사조약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906년 궁내부 특진관을 맡았고, 규장각과 시강원에서 일했다. 1908년 기로소 당상으로 원로 대우를 받았고, 기호흥학회 찬무원을 맡았다.
국권 피탈 이후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합병’의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11년 1월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고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3년 사망하자 1914년 장남 이범팔(李範八)이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