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집(公執), 호는 만당(晩堂).
1891년 증광시에서 진사로 합격하였다. 1894년 현릉 참봉, 1895년 궁내부 회계원 주사, 왕태자궁 시종관으로 임명되었고, 일본유람신사로 선발되었다. 1898년 외부·학부의 참서관, 1899년 학부편집국장이 되었다. 1900년 비서원 분비서승, 시종원 분시종, 주차일본국공사수원으로 발령을 받았고, 1901년 외국어학교장을 겸임하였다.
1902년 학부 편집국장, 1903년 서북철도국 감독, 1904년 철도원 감독, 중추원 의관, 내부 지방국장에 임명되었고, 판리공사를 겸임하였다. 1905년 법부 사리국장, 봉상제조, 평리원 판사·검사로 발령을 받았고, 특별법원판사를 겸임하였다. 1906년 일본 보빙대사 이재완을 수행하여 일본을 방문하였고, 비서감승, 시종원 부경, 평리원 판사, 서리재판장 사무, 봉상사 제조를 지냈다. 또한 이 해 1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2등 서보장, 8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태극장을 받았다.
1907년 학부협판·학부차관·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경기재판소 판사와 경기세무감을 겸임하였다. 또한 인천항에서 한국 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봉영하고 환영회비를 모아 행사를 주도하였다. 1914년 6월 종5위에 서위되었고, 1915년 11월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 12월 아버지 이주영이 사망하자 1918년 2월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1928년 11월 쇼와대례기념장을 받고, 1929년 조선 귀족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출연기금으로 조직된 창복회로부터 1930년 1월부터 매월 150원을 받았다. 1931년 1월 사망하자 3월 손자 이경우(李卿雨)가 작위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