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종석.
1913년 경기도 고양군 일산에서 면서기로 일했다. 1919년 동인지 『신청년』과 잡지 『녹성』 발간에 참여하였고,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였다가 한 달만에 그만두었으며, 『만주일보』 서울지국에 입사하였다. 그 이듬 해 동아일보사 사원으로 입사한 뒤 1923년까지 사회부 기자 · 상해특파원 · 사회부장을 지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회부장, 1926년 시대일보사 사회부장, 중외일보사 편집국 차장이 되었다. 1927년 다시 조선일보사로 옮겨 1931년까지 사회부장 · 편집인 · 정리부장을 지냈으며, 1931년 12월부터 중앙일보사 지방부장으로 근무하다가 이듬 해 4월 퇴직하였다. 1930년 조선농민사에 반대하는 일부 비천도교인 이사와 천도교 청년들이 임시대회를 소집하고자 결성한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도 피선된 후 선전위원 등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박일형 · 이몽과 함께 문필가협회 발기인이 되었으며, 1934년 과학의 날 실행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매일신보사로 가서 1940년까지 편집국장, 동경특파원을 지냈다. 일제 말기인 1941년부터 신문과 잡지에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하고 침략전쟁을 선전 · 선동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1941년 임전대책협력회에 가담하였고, ‘황도정신의 선양’과 ‘전시체제하 국민생활의 쇄신’ 을 강령으로 삼고 설립된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평의원을 맡았다. 1944년 국민동원총진회 상무이사, 1945년 6월 친일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를 맡았다.
해방 이후 사망할 때까지 『동아일보』 · 『조선일보』 ·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을 맡았다. 1946년 『대한독립신문』이 속간될 때 편집국장이 되었고, 1949년 국회의장 신익희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1950년 국회의원 선거, 1954년 총선, 1956년 고양군 민의원 보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0년 고양군에서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그 이듬 해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직위를 잃었다. 1962년 8월 대한민국장, 1964년 10월 공보부 제정 방송문화상을 받았다. 1967년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장, 『언론계』 고문을 맡았다. 1970년 명예문학박사 학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받았다. 1973년 문화공보부의 민족기록사화 추진위원을 맡았고, 그 이듬 해 국학개발위원회와 한국민족문화고증학회를 발족하여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80년 새싹회로부터 소파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