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종(咸從). 창씨명은 니시카와 단이치(西川潭一), 니시카와 리유단(西川龍潭)이다. 뒤의 일본 이름은 창씨개명 수속이 완료되기 전의 이름이다.
1893년 14세의 나이로 한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그 이듬 해 어윤중의 추천을 받아 일본유학시험에 합격하여 1895년 일본으로 갔다.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예비교육을 받았고, 사관학교 예비학교인 세이조학교(成城學校)를 거쳐 1899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동경 야전포병연대에서 견습사관을 지냈다. 1900년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육군포병 참위에 임명되었고, 1901년 육군무관학교 교관이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참모국 소속의 일본군 접대위원으로 경성병참사령부에서 병참 및 정보 업무에 힘썼다.
1905년 고종의 시종무관이 되었으며 1907년 7월 퇴임 때까지 측근으로 일했다. 그동안 시종원에서 부경으로 일했으며, 군무 시찰을 목적으로 일본에 보내졌다. 1905년 5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4등 태극장, 1906년 4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3등 팔괘장, 의친왕(義親王)의 일본 개선관병식을 수행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욱일장을 받았다.
1907년 7월 박영효·이도재 등이 고종 양위를 반대하는 무장봉기를 기도하자 이 사건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육군법원에 구속되었다. 같은 해 8월에 방면되었으며, 순종 때 시종원 무관으로 복직하였다. 그 이듬 해 11월 일본 정부로부터 700원을 받았다. 1909년 순종이 서쪽 지방을 순행하던 길에 이완용 내각의 국무대신이자 일진회 거두였던 송병준의 ‘불경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담은 송병준과 대립하였다.
1910년 국권 상실 이후에는 일제조선군사령부 소속이 되었고,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1915년 11월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0년부터 이강공부무관에 임명되었고, 그 해 4월 관직에 대한 공로로 훈3등 서보장과 12월 종군기념장을 받았다. 1926년부터 이왕부무관을 지냈고, 1928년 11월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으며, 1929년 7월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0년 육군 중장으로 승진하였고, 1931년 4월 예비역이 되었다. 그 해 5월 특별상여액 3,220원과 퇴직특별사금 및 수당액 1만 590원을 받았고, 10월 친일단체인 갑자구락부가 주최하는 전선시국대회 선전계에서 활동하였으며, 만몽재주동포후원회 평의원을 지냈다. 1934년 4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가 되어 그 후 1943년 7월 사망할 때까지 역임하면서 매년 1,800원을 받았다. 또한 1934년에는 시중회 평의원을 맡았고, 1935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회의에 참석하여 ‘조선에서의 징병제 실시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은배 1조를 받았다. 1938년 일제가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자 『매일신보』에 이를 지지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1939년 배영동지회 이사· 연맹 상담역,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