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중추원 의관·내장원 종목과장으로 임명되었고, 1901년 한성부 판윤으로 발령 받아 한성부재판소 수반판사를 겸임하였으며, 군부협판 칙임관 3등이 된 후에 군부각항문부 조사위원장, 육군보병 참령·부령, 친위제1연대장, 육군피복위원장, 중앙은행창설 사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03년 경무사 칙임관 3등이 되었으며, 육군참장·원수부기록국총장 등을 지냈다. 1904년 제용사장을 겸하였고, 군제의정관을 맡았으며, 1905년 헌병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팔괘장을 받았다.
1906년 진명여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고, 전선사장을 역임하였다. 1908년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한 교육진흥과 지역개발을 위해 설립된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기호흥학회 찬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11월 다이쇼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1년 4월부터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였고, 중추원 회의에 출석하여 “병합정신이 점차 발휘되어 내선 상호의 이해가 깊어지고 있음은 실로 기뻐할 일이다”라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1925년 신일본주의를 표방한 친일 단체인 국민협회 고문을 맡았고, 1927년 12월 훈4등 서보장, 1928년 11월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조선소년총연맹 교육계측 위원, 조선박람회 평의원, 1932년 조선나병예방협회 발기인, 193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시정연구회 제도부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2월 13일 사망하였고, 그 해 3월에 은배 1개와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