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기호흥학회는 1908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이다. 민족자강을 위한 교육계몽운동을 목적으로 정영택 등 기호지방 인사 105명이 창립하였다. 1907년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된 이후, 교육진흥을 위한 여러 단체가 지역별로 설립되었다. 기호흥학회는 흥학운동의 일환으로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고, 교사 양성을 위한 기호학교를 설립하였다. 1909년 7월까지 『기호흥학회월보』를 12호까지 발간하였다. 회보의 내용이 국권 회복에 관계된다고 하여 압수되기도 하였다. 1910년 9월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정의
1908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
개설
연원 및 변천
이 시기에 학교설립 등 교육진흥사업의 체계있는 지역적 추진을 위해 각 지역별로 여러 단체가 설립되었다. 기호흥학회는 그 중 하나로서 서우학회 · 한북흥학회 · 호남학회에 이어 설립되었다. 2개월 뒤에는 교남교육회 · 관동학회가 설립되었다. 이 회의 기본 정신은 기호적(畿湖的)이 아니고 국가적이라 하여 지방적 분열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정치적이 아니라 교육적인 운동임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회칙에서 “본회는 경기도 및 충청남북도에 흥학하기로 목적함(제2조). 전조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학업을 권장하며 회보를 간행하여 일반인사에게 지식을 주입하며, 경기도 및 충청남북도 각 군에 교육을 발전하게 함(제3조).”이라고 목적을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교육진흥을 강조했지만, 근본 목적은 물론 독립 · 애국사상의 고취에 있었다.
임원과 조직은 회장 · 부회장 · 총무 · 회계감독 · 서기 · 회계 각 1명, 간사 약간 명 및 평의원들로 구성하고, 임기는 1년이었다. 회장은 초대 이용직에 이어 윤웅렬(尹雄烈) · 김윤식(金允植) · 홍필주(洪弼周) 등의 순으로 역임하였다. 지회는 경기도의 광주 · 수원 · 양근 · 장단 · 교하 · 강화 등 6개 군, 충청북도의 청주 · 충주 · 청양 · 풍덕 등 4개 군, 충청남도의 서산 · 공주 · 연산 · 당진 · 해미 · 목천 · 홍주 등 7개 군에 있었다.
이 회의 흥학운동은 유지들의 협력으로 비교적 활발해 학교 설립을 속속 추진하였다. 그러나 교사의 부족으로 1908년 6월서울 소격동에 교사 양성을 겸한 기호학교를 설립하는데 머물렀다.
이 학교에는 3년 과정의 본과와 1년 반 과정의 특별과를 두었다. 초대 교장은 윤효정이 맡았고, 이어 박승봉(朴勝鳳)이 맡았다. 교감은 이원생(李源生) · 김경식(金瓊植), 교사에는 정만조(鄭萬朝) · 이상익(李相益) · 이장로(李章魯) · 유병필(劉秉珌) · 유옥겸(兪鈺兼) · 현귀(玄槶) · 김하정(金夏鼎) · 이항직(李恒稙) · 이응종(李膺鍾) · 유일선 · 조희철(趙熙轍) · 유치훈(兪致勳) · 김인식(金仁湜) · 남기석(南基奭) 등이었다.
회보로 『기호흥학회월보』를 발간하였다. 발행인은 김규동(金奎東), 편집인은 이해조(李海朝)이다. 1909년 7월까지 월간 · 국판으로 통권 12호를 발간했으나, 내용이 국권 회복에 관계된다 하여 제6 · 9 · 10 · 11호 등이 여러 번 압수되기도 하였다. 창간호에는 의친왕의 ‘咸與維新(함여유신)’이라는 친필을 실었다. 1910년 9월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참고문헌
-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
- 「구한말애국계몽단체의 활동과 성격」(정관, 『대구사학』20·21, 1982)
- 「기호흥학회에 대하여」(이현종, 『사학연구』21: 김성균교수화갑논문집,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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