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관립의학교 제1회 졸업생 28명 중의 한 사람이다. 1904년 의학교 교관을 역임하던 중 육군 군의보(軍醫補)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육군 3등군의로 승진되면서 다시 의학교 교관으로 전보발령을 받았다.
1907년 관립의학교가 대한의원 교육부(의육부)로 개편되면서 지석영(池錫永)·유세환(劉世煥)과 함께 정3품 대한의원 교관에 임명되고, 그는 그 해에 다시 3등 주임관(奏任官)이 되었다.
1908년 대한의원의 교수가 되었으며, 한성 내외의 의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의사연구회(醫事硏究會)를 조직하여 총무가 되었다. 이 회의 회장은 김익남(金益南), 부회장은 안상호(安商浩)였다.
그 해 12월 6일 우두실시30주년기념제의 취지서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1909년 대한의원 교수직을 사임하고 의원을 개업하였다. 이듬해에는 정영택(鄭永澤)과 함께 위생회(衛生會)를 조직하였다.
한편, 대한의사총합소(大韓醫士總合所)의 총무가 되고, 이 회에서 설립, 운영하는 동서의학원(東西醫學院)의 서의학(西醫學) 강사를 역임하는 등 한말 의학교육의 중심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