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운정(雲庭). 경기도 양주 출신. 심의성(沈宜性)은 사촌누이의 아들이고, 딸 윤정원(尹貞媛)은 한국 최초의 유럽 여자 유학생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이후 탁지부주사로 근무하였고, 1898년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할 때 고종양위음모사건에 관련되어 일본 거류지에 숨어 있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고베[神戶]에 머물며 박영효(朴泳孝) · 우범선(禹範善) 등과 조일의숙(朝日義塾)을 세워 우리나라 유학생을 수용하였다.
우범선과 사귀는 동안 우범선이 민비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의 관련자라는 것을 알고, 민비의 원수를 갚으려고 고영근(高永根) 등을 시켜 우범선을 죽였다. 귀국하여 1905년 이준(李準) · 양한묵(梁漢默) 등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 의회를 중심으로 한 입헌정치 체제를 목적하였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 등과 헌정연구회를 토대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였다. 이 회는 민중을 기반으로 애국 인사를 포섭, 교육 확장과 산업 개발을 통한 한국의 자강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서, 전국에 25개 지부를 설치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퇴위당하자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해산당하였다.
이에 장지연 · 오세창(吳世昌) · 권동진(權東鎭) · 유근(柳瑾)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 사업을 계승하였다. 대한협회의 총무로서 이 회의 기관지인 『대한협회회보』 · 『대한민보』를 간행하여 일제의 통감정치와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규탄, 공격하였다.
1908년 전국에 60여 지부를 결성하였으며, 회원이 수만 명에 이르는 등 강력한 애국단체로 성장하였다. 1907년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차용한 금액이 1300만원의 거액에 달하자, 일제에 의한 경제적 예속이 주권 상실의 근본임을 판단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점되자 창신동에 숨어 살았다.
1919년 3 · 1운동 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강원도 철원군으로 옮겼고, 1924년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로 이사하였다. 1931년부터 『동아일보』에 「풍운한말비사」를 연재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홍만자회(紅卍字會) 한국 지부의 일을 맡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