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진은 천도교 지도자이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천도교가 창건할 때부터 천도교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6 · 10만세운동 당시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다. 또한 신간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광주학생운동을 널리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를 준비하였다.
권동진(權東鎭, 1861~1947)은 충청북도 괴산군 출신으로 무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애당(愛堂), 우당(憂堂)이고, 법명은 실암(實菴)이다. 원래 집안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나 아버지 대 괴산으로 옮겨와 이곳에서 태어났고, 1869년 무렵 서울 재동으로 이사해 성장하였다.
19세가 되던 1880년경 하도감(下都監)에서 일본군 장교를 초빙해 사관학교를 개설할 때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졸업 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희연 등과 초관(哨官)에 임명되어 좌우영의 교련을 맡았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박영효가 거느리는 전후영 소속으로 무관학교 출신 5인과 함께 대궐에서 고종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1885년 무렵 1년간 경상남도 함안군수를 역임하였다. 함경도 안무중군(按撫中軍) 겸 토포사(討捕使)로 있다가 중추부(中樞府) 내금장(內禁將)을 지내고, 1894년에는 거문도 첨사(僉使) 겸 수방장(守防將)으로 나갔다. 1895년 소위 대원군의 ‘ 명성황후 폐위’ 계획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면서 그 해 12월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에 망명한 후 일본 도쿄〔東京〕의 근위사단에서 병학(兵學)을 공부하면서 3연대에서 3년여 동안 실전 훈련을 받았고, 일본 육군성에서 경리 사무를 익혔다. 그런데 오사카〔大阪〕에서 동학 교주로서 망명 중인 손병희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1906년 1월 5일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건하고 귀국하는 길에 오세창 등과 함께 동행하였다. 손병희가 천도교 대도주(大道主)에 취임해 조직을 정비할 때 그를 보좌하며 천도교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중추원 부참의(副參議)에 임명되었으나 2개월여 만에 그만두고 교육 진흥과 식상 흥업을 앞세운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1907년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설립된 대한협회에서 실업부장과 부회장을 맡았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천도교 지도자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재편의 움직임이 보이자 손병희, 오세창, 최린과 함께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기독교, 불교와의 연대를 모색한 끝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2월 22일 출옥하였다.
1922년 5월 손병희가 세상을 떠나면서 천도교는 정치노선과 종교노선에 따라 거듭되는 분화를 겪었다. 이때 천도교 구파 지도자로서 자치운동을 도모하는 천도교 신파와 달리 비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을 걸었다. 천도교 구파가 1926년부터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6 · 10만세운동을 준비할 때 1만 원 가량의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으나 만세운동이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1927년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의 민족협동전선체로서 탄생한 신간회에서 부회장을 맡았다. 1929년에는 신간회 복대표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이 소식을 널리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경찰에 의해 사전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신탁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신한민족당을 창당하였다. 1947년 3월 9일 87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