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삼 ()

근대사
인물
1910년대에 만주에 망명하여 1920년대까지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독립운동가.
이칭
본명
김긍식(金肯植)
이명
김종식(金宗植)
한경(漢卿)
일송(一松)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8년
사망 연도
1937년
본관
의성(義城)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군(지금의 안동시)
주요 경력
한족회 서무사장|서로군정서 참모장|대한통군부 교육부장|대한통의부 총장|국민대표회의 의장|정의부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혁신의회 의장|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 중앙집행위원장|한국독립당
대표 상훈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관련 사건
청산리 대첩|민족유일당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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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김동삼은 1910년대에 만주에 망명하여 1920년대까지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회영 등과 함께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결성하며 병영인 백서농장을 운영하는 활동을 펼쳤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통의부, 국민대표회의, 정의부 등 서간도의 대표적인 단체와 독립군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민족유일당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항일 공작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옥고를 치르다 옥사하였다.

정의
1910년대에 만주에 망명하여 1920년대까지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독립운동가.
인적사항

김동삼(金東三, 1878~1937)은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일찍부터 유학(儒學)을 익혔다. 본명은 김긍식(金肯植)으로, 김동삼은 만주 망명 후 사용한 이름이다. 또다른 이름으로는 김종식(金宗植)이 있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한경(漢卿), 호는 일송(一松)이다.

주요 활동

1907년 안동 내앞마을에 3년제 중등 과정의 근대학교인 협동학교를 세우고, 신민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운영하면서 경상도 일대의 계몽운동가들의 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10년 8월에 대한제국이 망하자 김대락, 이상룡 등과 만주 망명을 계획하고, 1910년 12월 말부터 실행에 옮겼다. 1911년 1월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류허현〔柳河縣〕 삼원보에 도착하여 서울에서 온 이회영 일가를 비롯한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결성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삼성(東三省)에서 따서 김동삼(金東三)으로 바꾸었다. 1914년에 신흥학교 졸업생들과 노동야학 졸업생 등 385명을 이끌고 통화현 팔리초 깊은 산속에 들어가 백서농장이라는 이름의 병영을 건설하였다.

1919년 3월 지린〔吉林〕에서 민족 대표 39명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이상룡과 더불어 서명에 참여하였다. 이 선언 발표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4월 10일부터 이튿날까지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고 다시 서간도로 되돌아갔다.

서간도에서는 1919년 4월 한족회(韓族會)가 결성되자 백서농장을 해체하고 삼원보로 돌아와 한족회에서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 이어서 서로군정서의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1920년 여름 지청천 사령관과 함께 300여 명의 서로군정서군을 북간도로 이동시켰다.

서로군정서군은 청산리 대첩을 치른 후 북상하여 밀산에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10여 개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해 러시아로 넘어갈 때 동참하지 않고 서간도에 남았다. 경신참변으로 동생을 잃고 일가를 북만주 닝안현 주가둔으로 이주시키고, 자신은 류허현과 싱징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6월 남만통일회를 주도하여 만든 대한통군부의 교육부장을 맡았다. 그해 8월 30일 전만한족통일회가 결성되고, 대한통군부가 대한통의부로 확대되면서 대한통의부 총장을 맡았다. 1923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침체 현상을 극복하고자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와 남만주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에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와 이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로 나뉠 때 개조파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두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5월 15일 의장에서 물러나 만주로 되돌아갔다.

1923년 가을부터 만주 지역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는 일에 뛰어들어 1924년 7월과 10월에 10개 단체 대표를 모아 전만통일회주비회를 열었다. 의장에 선임되어 11월 24일 정의부를 탄생시켰다. 류허현 삼원보에 본부를 둔 정의부에서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안동에서 함께 망명해 온 이상룡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임되어 국무위원에 임명하였지만, 상하이로 가서 부임하지 않았다.

1927년부터는 민족유일당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해 4월 15일 지린 남쪽 융지현 신안툰에서 민족유일당촉성회의가 열리자 정의부 중앙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어서 1928년 5월 정의부를 대표하여 삼부통합회의를 개최하였으나 통합에는 실패하였다. 1928년 7월 삼부통일회의가 결렬되기 직전 정의부를 이탈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29년에는 좌우 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뽑혔다. 민족유일당운동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고,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자 고문을 맡았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안동 출신이자 사돈인 이원일, 경상북도 영양군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인 남자현과 항일 공작을 추진하려고 하얼빈〔哈爾濱〕에 잠입하였다가 붙잡힌 것이다.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서울 경성 감옥으로 이감되었다. 1937년 4월 13일 경성 감옥에서 순국(殉國)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희곤,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지식산업사, 2009)
김희곤, 『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지식산업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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