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이래 추진되어 오던 독립운동 통일전선 구축운동의 일환으로 1928년 7월에 열렸던 삼부(三府) 통일회의가 결렬 상태에 이르렀다. 이에 촉성회에 가담하였던 일부가 정의부(正義府)를 이탈하여 길림성에서 임시 간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 참가한 김동삼(金東三)·이종건(李鍾乾)·김상덕(金尙德)·배활산(裵活山)·김응섭(金應燮) 등은 유일당 촉성의 조직과 선전을 위해 각자 구역을 분담, 남·북만주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선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11월 중순 반석현(磐石縣)에서 민족유일당의 이름으로 동맹규약을 발표하고 회원을 모집하였다.
그 결과, 신민부(新民府) 군정파(軍政派) 및 참의부(參議府)가 완전히 촉성회에 투합하였다. 12월 하순 길림에서 신민부 군정파의 주창에 의해 신민부·참의부를 해체하고 과도적 임시기관으로 혁신의회를 설치하였다. 이어 기성회와 의견이 일치하여 이 단체를 조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집행위원으로 촉성회측은 정의부를 탈퇴한 지청천(池靑天)·김동삼·김원식(金元植)·김상덕 외 4명, 참의부측은 김희산(金希山)·김소하(金筱夏) 외 2명, 신민부 군정파측은 김좌진(金佐鎭)·황학수(黃學秀)·김시야(金時野)·최호(崔灝)·정신(鄭信) 등이었다.
이 단체는 혁신의회와 표리일체가 되어 유일당의 촉성에 주력하기로 했지만, 길림은 국민부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에 혁신의회의 핵심사업인 군정부의 조직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1929년 5월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혁신의회는 해체되었고, 책진회가 그 사업을 이어받아 유일당 확대운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