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극(金星極)과 전성륜(全聖倫)이 이범윤을 단장으로 추대하여 조직하였다. 실제 책임은 중부대판(中部大辦) 직에 선임된 김성륜이 맡았다. 김성극은 고문에 선임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을 존중하였으며, 왕청현 춘명향(汪淸縣春明鄕)에 근거지를 두었다.
3백여 명 규모로 김성극(金星極)·홍두식(洪斗植) 등의 지휘로 통제되었으며, 장총·권총 3백정 정도의 무기로 무장하였다. 각지에 분단·지단을 설치하여 서로 연락, 호응하며 업무를 수행하였다.
1920년 10월 22일 북간도 독립운동 단체인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에 편성되어 청산리전투에서 대승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11월 모연대장(募捐隊長) 염흥미(廉興味) 등 16명이 함경남도 갑산군 보혜면 견평리에서 일본군 20명과 접전하여 7명을 사살하였으나, 대장 염흥미는 전사하고 말았다.
또한, 안도현(安圖縣)도산(島山) 분단장 이승국(李昇國)은 대원 김명권(金明權)·서봉근(徐奉根)·오운흥(吳雲興) 등을 훈련시켜 접전에 대비하였다. 그런데 1921년 1월 평안남도 덕천군 태극주재소(太極駐在所) 순사 오가와라(小河原辰之助)를 사살한 뒤 그 해 5월 평안북도 강계경찰서원에게 체포되었다.
그 해 7월 단원 15명이 장백현(長白縣) 18도구(十八道溝) 대양동(大陽洞)에 있는 군비단의용대(軍備團義勇隊)에 갔다가 일본 경찰 6명과 중국 경관 70명으로 구성된 공동 수색대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전사 12명, 부상 2명의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10월 함경남도 혜산군 운흥면 오산리에서 혜산경찰서원 다야마(田山安) 등 4명의 습격을 받았으나 용감히 싸워 다야마를 사살하였다. 그리고 1922년 7월 중대장 정세만(鄭世萬)이 40명의 대원을 이끌고 혜산경찰서를 습격하여 순사 이노우에(井上安太郎)와 임택주(林宅柱)를 사살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