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헌법이 공포되면서, 연길(延吉) · 왕청(汪淸) · 화룡(和龍) · 혼춘(琿春) 등의 지방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각 단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자치 기관을 만들고,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 간도국민회로 통합, 발전시켜 갔다.
1920년 1월 본부를 연길현 춘양향(春陽鄕) 합마당(蛤蟆塘)에 두고, 회장 구춘선, 부회장 강구우(姜九禹), 비서 고동환(高東煥), 서기 김정(金精), 재무 김규찬(金圭燦), 경호 부장 박두화(朴斗和), 편집 부장 이완(李完), 통신 부장 최윤주(崔允周) 등을 선임하였다.
지회가 늘어나고 세력 범위가 커짐에 따라 본부를 중앙총회로 개편하고 지인향(志仁鄕)으로 옮겼다.
5개의 지방 총회 및 52지회를 두었는데, 중앙 총회는 연길현 지인향(志仁鄕) 의란구(依蘭溝)에 두고 회장에 강구우, 동부지방 총회는 연길현 지인향 화령촌(花嶺村)에 두고 회장에 양도헌(梁道憲), 서부지방 총회는 연길현 숭례향(崇禮鄕) 묘구(廟溝)에, 남부지방 총회는 화룡현 지신사(智新社) 장재촌(長財村)에 두고 회장에 마진, 북부지방 총회는 왕청현 춘화향(春華鄕) 합수평(合水坪)에 각각 두고 있었다.
그리고 훈춘의 대한국민회 회원을 포섭한 뒤로는 지회를 80개로 확대하고 임원을 개선하여, 회장에 구춘선과 이명순(李明淳)이 함께 피선되었고, 부회장 박관일(朴觀一), 서기 여남섭(呂南燮) · 오종범(吳宗範), 회계에 오현경(吳玄慶)을 선임하였다.
국민회는 주로 군자금을 모금하고 안무(安武)의 지도하에 훈련 받은 약 3백 명의 독립무장대와 홍범도(洪範圖) 휘하의 6백여 명을 국민회 직할 대한독립군으로 편성하고 홍범도의 통솔하에 두었다. 그리고 간도 전역의 무장 단체를 통합하여 무기 구입과 독립군 양성에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
통합 후 진영은 사령관에 최진동(崔振東), 부관에 안무, 연대장에 홍범도 등으로 정비되어, 가장 활발한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뒤 10월 20일 제1연대 홍범도, 제2연대 김좌진(金佐鎭), 제3연대 최진동의 북간도 독립군부대는 간도국민회의 후원으로 청산리대첩에 크게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