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명천 출신. 한국이 일제에게 병탄되자 1912년 만주 길림성 훈춘현(吉林省琿春縣)의 진안촌(鎭安村)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남별리(南別里)에 있는 야소학교(耶蘇學校) 직원으로, 교민 자녀의 구국 교육과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 3월 11일 훈춘 대한국민회를 조직, 회장이 되어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과 함께 그 지방에서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체적 구실을 하였다.
3월 20일 황병길(黃丙吉)과 주동하여 훈춘의 동문과 서문 사이 도로에서 2600여 명이 참가하는 독립선언시위운동을 일으켜, 관내 47개소에서 1만 5080여 명의 교민이 참가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회원 2만 1000여 명을 헤아리게 된 훈춘 대한국민회 회장으로서, 북간도 한인사회의 자치와 민족 교육, 독립운동을 벌여 온 간민회(懇民會)가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확대, 개편되는 과정 중 이와 합작하였다. 이후 대한국민회가 북간도 4현에 거주하는 40만 교포사회에서 80여 지회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공헌하였다.
또한, 대한국민회 밑의 국민회군이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최명록(崔明錄)의 군무도독부군(軍務都督府軍)과 제휴하여 무력 항일투쟁을 전개하자 이에 참여, 활약하였다. 그 해 9월 장차 독립 항일전을 강력히 수행하기 위해 북간도 방면의 각 독립 단체 대표들과 훈춘 사도구(四道溝)에서 만나 결사대를 조직, 무력투쟁을 결의하였다.
1920년 10월 상해임시정부 동만주 총판부(總辦部) 조직에 참여하여 참사(參事)로 활동하였고, 같은 해 청산리대첩 후 밀산(密山)으로 철수하였다.
노령(露領)으로 옮기기 전 각 독립군단의 통일체인 간도대한국민회 대표로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고, 국민회군 지휘관으로 휘하 병력 700여 명, 장총 700여 자루, 기관총 4문으로 무장한 뒤 일본군과 여러 차례 격전 끝에 많은 전과를 올리다 끝내 전사하였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