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대한제국기 때 의병가를 만들고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독립운동가이다. 16세 때 고흥유씨(高興柳氏) 유제원(柳濟遠)에게 출가했다. 1895년 시아버지 유홍석(柳弘錫)이 춘천과 가평 일대에서 의병 작전을 전개할 때, 윤희순은 「안사람의 의병가」 · 「병정의 노래」 등 수십 수의 의병가를 지어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직접 · 간접으로 춘천의병 활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1935년 8월 1일 향년 76세로 만주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1983년 8월 3일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정의
대한제국기 때 의병가를 만들고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독립운동가.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이 때 춘천의병이 무기의 열세로 적의 공격을 못이겨 유홍석이 재종제인 유인석(柳麟錫)의 제천의병(湖左義陣)에 가담하였고 또 유인석과 함께 요동에 갔다가 귀국하는 동안에, 다른 지방에서 온 의병에게 마을 부녀자와 협력하여 밥을 지어주고, 빨래를 해주는 등 의병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그 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이어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가 퇴위하고 한국군대마저 해산되자 각지에 흩어진 해산군에 의해 정미의병이 봉기하였다.
이에 같은 해 8월 유홍석은 족숙인 유중악 등과 모의하고 가정리(柯亭里) 항골[恒谷]에서 유영석(柳寧錫) · 유봉석(柳鳳錫) · 박화지(朴華芝) 등과 더불어 의병 600명으로 가평 주길리(珠吉里) 등지에서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 때 의병자금과 탄약 · 군량이 부족하게 되자 윤희순은 향민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해 여의내골[餘義川谷]주산(周山)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무기와 탄환을 제조, 공급하였다.
한편으로는 의병가를 지어 부르게 하여 의병 훈련을 진작시켰다.
유홍석이 주길리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제천 장담리(長潭里) 유중교의 집에 머무르고 치료하면서 의병 재조직을 계획하던 중 1910년 8월 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유홍석이 왜적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먼저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후 1911년 윤희순 가족 역시 유홍석을 뒤따라 만주로 들어가서 의병 재거를 도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3년 12월 유홍석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고, 1915년 1월 이미 망명해 온 유인석이 죽었으며, 남편인 유제원 또한 같은 해 10월 회인현(懷仁縣)에서 죽었다.
이에 윤희순은 대한독립단에 가입해 투쟁하는 유돈상(柳敦相) · 유민상(柳敏相) 두 아들을 포함한 자손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맏아들인 유돈상이 자신의 장인 음성국(陰聖國)과 함께 일본경찰에게 잡혀 고문 끝에 1935년 7월 19일 순국하였다.
3대에 걸쳐 의병활동의 뒷바라지를 하던 윤희순는 10여 일 뒤인 8월 1일 자손에게 훈계하는 글과 일생기록을 남기고 향년 76세로 만주땅에서 일생을 마쳤다. 윤희순의 시신은 만주 해성현 묘관둔(海城縣苗官屯) 북산에 장사지냈고, 아직 고향으로 반장(返葬)되지 못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강원의병사』(강원의병운동사연구회, 1987)
- 『외당선생삼세록』(박한설 편, 강원일보사, 198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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