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명 김광해(金廣海).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19년 3·1운동 때 의주군 광평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한 뒤 의주 경찰의 눈을 피하여 오동진(吳東振) 등과 남만주로 망명하여 청년단조직에 헌신하였다.
1920년 9월 18일에 미국의 국회의원단이 내한한다는 소식을 듣고 광제청년단장(廣濟靑年團長) 오동진의 지령에 따라 7월에 동지 임용일(林龍日)과 폭탄을 휴대하고 평안북도 선천에 잡입하였다.
이들은 미국국회의원단의 입국을 기해 국내 주요도시의 일제기관 폭파와 일본요인 암살을 위해 준비공작을 하였으나, 일본경찰이 이 정보를 사전에 탐지하고 경계강화를 취하였기 때문에 실현하지 못하고 만주로 귀환하였다.
1925년 6월 정의부의용대 제1대장 명의로 평안도에 격문을 뿌리고 7월 4일, 이진무(李振武)·홍학순(洪學淳)·김인옥(金仁玉)·김학규(金學圭)·이창만(李昌萬)·오동락(吳東洛) 등과 함께 평안북도 철산군 차련관(車輦館) 주재소를 습격, 4명의 경찰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그 부근에 있는 부호 양조업자 집에 들어가 군자금 4,000원과 금시계 1개를 영수하고 군중이 많이 모인 장터로 나와 그들의 활동상을 설명하였다. 야음을 틈타 만주로 귀환하던 중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아 치열한 교전 끝에 1개월 만에 귀환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후에는 김광해(金廣海)라는 가명을 쓰고 톈진[天津]·상해 등지를 전전하면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광복 후 1949년 10월에 귀국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