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김수현(金守鉉)·김창한(金昌漢)·구우일(具宇一)·구춘희(具春熙), 호는 일정(一丁). 경상남도 의령 출신.
진주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2월 28일 동생 구은득(具銀得)의 요청으로 3월 3일 상경하여 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곧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3월 12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동지 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정용선(鄭溶璿) 등과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고 계획된 14일에 시위 운동을 전개하여, 군중 약 3,000명의 호응을 받았으나, 경남 경찰에 잡혀 2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서울 중동학교 재학 중 대한적십자사 등의 단체에 입단,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2년 상해로 가서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 만나, 1923년 8월 의열단에 입단하고 무력에 의한 항일 투쟁을 기도하였다. 같은 해 12월 국내 중요 조선 총독부 관서를 파괴할 목적으로 동지 수명과 국내에 잠입하여 제3차 의열단 폭동 계획을 진행하다가, 이듬해 12월평양 경찰에 발각되어 평양에서 붙잡혔다.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4년형을 언도받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8년 형기를 마치고 시베리아로 가서 동지들과 반제지방단부(反帝地方團部)를 조직하고 고향에 있던 김용호(金鎔浩)의 애국심에 감동되어 의령지방단부를 조직, 독립운동 자금 모금 등에 활동하였다.
그래서 진주 지수변의 구재서(具再書) 등으로부터 일화 5,000원을 받아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송금하였다. 1941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4월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에서 고려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