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최명록(崔明錄, 崔明祿) · 최희(崔喜). 함경북도 온성 출신.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서 중국군(中國軍)에 가입, 군사 지식과 전투 실력을 함양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3형제와 같이 조국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동지를 모아 독군부(督軍府)를 조직하고 부장(府長)에 취임하였다. 본부를 왕청현(汪淸縣)에 두고 사령관에 이봉남(李鳳南), 부사령관에 이원(李園), 참모장에 김호석(金浩錫)을 각각 임명하였다.
이어 무기를 구입하여 군인 500여 명을 장총으로 무장시키고, 4개 중대로 나누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태범(李泰範) 등과 함께 청년 300여 명을 모집, 도독부(都督府)를 조직하고 사령관이 되어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모든 일을 항상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洪範圖)와 상호 협조하였다.
3 · 1운동 이후 각 독립군부대는 일제의 군경과 항전을 계속하며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였다. 1920년 6월 홍범도와 함께 종성(鍾城)의 삼둔자(三屯子) 부근에서 일본 제19사단 소속 야스가와[安川] 소좌(少佐)가 거느리는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12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계속되는 독립군의 국내 진입작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국경을 수비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 일본군이 그 해 7월 1개 대대병력으로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鳳梧洞)을 포위, 공격해 왔다.
이 때 홍범도와 함께 진두에서 지휘하여 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워 봉오동의 주민들을 미리 피난시키고, 일본군들을 고스란히 봉오동으로 가두어 놓고 사방 고지에서 사격을 가해 사살 157명, 중경상자 300여 명이라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최진동은 사령관으로, 홍범도는 제1연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이어 화양현(和陽縣) 삼도구(三道溝) 다산리(多山里) 부근에서 제3연대장으로,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제1연대장 홍범도와 함께 일본군과 교전, 60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 뒤 북간도 · 시베리아 등지에서 부하 수천 명을 거느리고 무장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