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일제의 한인대학살 만행으로 만주 동삼성(東三省) 일대의 독립운동전선이 큰 타격을 받아 혼란스러웠다. 이의 재정비를 위해 대한독립단·광한단·광복군총영 등의 대표는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였다.
우선 만주지역 수복의 책임자로 총지휘에 이웅해(李雄海), 참모에 전덕원(全德元), 재무에 오동진(吳東振), 사법에 현정경(玄正卿), 연락에 김우근(金宇根), 비서에 고할신[高轄信, 일명: 고활신(高豁信)]을 선정하고 각 단체를 통합한 민족단일의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주구배(走狗輩)의 토벌 등 2년 여의 투쟁 끝에 만주지역을 어느 정도 수복했으나, 단일의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지는 못하였다. 때마침 1922년 옥고를 치르고 만주로 돌아온 양기탁(梁起鐸)이 통일위원회를 구성, 독립운동단체의 통일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에 한족회·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 등의 대표가 1922년 2월 봉천성(奉天省)환인현(桓仁縣) 하구(河溝)에서 지금까지 분산 활동하던 각 단체를 통합, 대한통군부를 결성하였다. 이후 광한단, 대한광복군총영 등도 참여하였다.
총장 채상덕(蔡相悳), 비서장 고할신, 민사부장 이웅해, 군사부장 이천민(李天民), 교육부장 김동삼(金東三),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경무감 전덕원, 사령장(司令長) 김창환(金昌煥)을 선출하였다.
또, 지방기구까지 구비해 지방자치행정과 군사양성기관을 제정하고 환인·관전(寬甸)·집안현(集安縣)을 중심으로 50∼60명 내지 100여 명의 무장독립군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그 뒤 8월 23일 회의에서 무장독립단체의 통일문제에 대한 토론 결과, 대한통군부를 개방하고 다른 단체와 무조건 통일하되, 일체의 공결(公決)에 복종하자는 데 합의해 대한통의부로 개편되었다. →대한통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