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은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등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대한광복회 가입과 3 · 1운동에 참여한 후에는 혁신단을 조직하여 혁신공보를 발행하고 암살단을 조직하여 미국 의원단이 국내에 들어올 때 의열 투쟁을 벌일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김상옥(金相玉, 1889~1923)은 한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본관은 김해(金海), 별명은 김영진(金永鎭), 아호는 한지(韓志)이다.
집안이 어려워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며 살았다. 14세에 대장간에서 일하면서 한문을 배우고 연동교회를 다녔다. 2년 후에는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학교 안에 설치된 야학에서 공부하였다. 18세 때인 1907년 9월경 동흥학교 내에 동흥야학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자신도 공부하였다.
1910년 21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황성기독교청년회관 부설 야간 영어반에 등록하였다. 이듬해부터는 종로 기독교청년회관(YMCA) 체육교사 이필주의 지도 아래 청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에는 동대문교회 근처에서 기독교서점을 운영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년 만에 폐업하였다.
1912년에는 삼남 지방을 돌며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면서 약을 파는 행상을 하였다. 이 무렵 훗날 동지로 함께 활동하게 되는 한훈을 만났고, 철물점을 개업할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해 가을에 동대문 밖 창신동에 형 김춘옥, 동생 김춘원과 함께 영덕철물점을 열었다.
1913년 24세 때 경상북도 풍기(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풍기광복단이 결성되자 채기중, 한훈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6년 5월 한훈, 유장열 등과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의 조성헌병대 기습 작전에 참여하여 헌병 2명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1917년 28세 때 영덕철물점에서 말총 모자를 제조 · 판매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양말과 장갑 등도 제조 · 판매하였다. 이 시기 직공이 50여 명이나 될 정도로 번창하였는데, 공인조합을 만들어 직공들을 보호하였고 동업자들의 결속을 위한 동업조합도 조직하였다. 또한, 사회 계몽과 인재 양성 사업을 위한 백영사(白英社)를 조직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철시(撤市)하고 직원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상인들의 만세 시위 참여도 독려하였다. 그날 오후 동대문 근처에서 경찰에게 쫓기는 여학생을 구하고 일본도를 빼앗았다.
1919년 4월 1일 중앙학교 학생인 박노영, 윤익중, 정설교, 불교학원 학생인 신화수 등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 모여 혁신단을 조직하고 기관지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였다. 4월 17일 제1호를 시작으로 5월 11일까지 주 6회, 그 후부터는 주 1회 발행하였으며 6개월 동안 지속하였다. 그해 8월에 『혁신공보』 발행과 관련해 체포되어 기소되었으나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해 10월에 발각되고 자금난까지 겹치는 바람에 『혁신공보』를 발행할 수 없게 되었다.
1920년 1월 하순 혁신단은 『혁신공보』 발간 대신에 조선총독부의 고관과 친일파들을 처단하는 의열 투쟁의 전개를 결의하였다. 이 무렵 김좌진의 길림군정서 요원으로 국내에 파견한 김동순에게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3월에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협의 하에 무기를 가지고 입국한 광복단 충청지구 결사대장 한훈을 만나 무기와 폭탄을 확보하고, 함께 암살단을 발족하였다. 이후 세 달간 암살단원들은 북한산 등지에서 특공 훈련에 들어갔다. 암살단원들은 8월 24일 미국 의원단 42명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관들을 처단하고 총독부를 폭파하며 일대 시가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윤익중과 김상옥은 각자의 집을 저당(抵當)하여 각각 1천 원과 2천 원의 운동자금을 만들었고, 박영효 등 사회 저명 신사들과 박승직 같은 동대문 지역 상인들의 협조를 받아 무기와 트럭 3대를 확보하였다.
암살단의 계획은 먼저 미국 의원단 환영 인파 속에서 태극기와 미국 국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선도하고 ‘암살단 취지서’와 ‘철시경고문’을 배포하는 것이었다. 또한, 트럭 1대에는 폭탄과 폭약을 실어 조선총독 이하 고관들을 처단하고, 다른 2대에는 사격대를 태워 출동 병력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8월 24일 당일 오전 경찰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치자 2층 창문을 통해 피신하였다. 경찰은 2층 방을 수색하여 ‘암살단 취지서’, ‘암살단 명부’ 등의 문건을 발견하였다. 때마침 이곳에 총과 탄환을 전달하러 온 한훈이 포박당하였다. 결국 몇 개월간 준비해 왔던 모의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로부터 3개월간 서울 시내 각처를 돌며 은신하였는데, 그동안 단원들이 차례로 붙잡혔지만 다행히 국외 탈출에 성공하여 만주 선양으로 피신하였다. 궐석재판(闕席裁判)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다.
1920년 11월 의열단원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최경학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을 지원하였다. 이듬해 1921년 1월 김원봉의 의열단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갔다. 같은 해 7월에 국내에 들어와 서울, 충청, 전라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자금을 모금하였고, 자신의 활동을 돕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병중에 있던 장규동을 대동하여 상하이로 탈출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 4월 상하이에서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 12월 다시 경성에 돌아와 암살단 동지를 재규합하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관과 친일파 처단, 총독부 폭파 및 시가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 종로 2정목의 경찰서 서쪽 창문을 향해 던진 폭탄이 폭발하면서 폭음이 종로거리를 뒤흔들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근처를 지나던 매일신보(每日申報) 사원 5명과 기생 1명, 어린이 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스스로 폭탄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폭파하고는 삼판통 고봉근 집에 몸을 숨겼다. 종로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별동수사대까지 꾸려진 가운데 서울 전역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으며, 거리의 행인들은 곳곳에서 몸수색을 당하였다. 결국 경찰 정보망에 은신처가 탐지되었다.
1923년 1월 17일 새벽 4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田村〕를 중심으로 경찰 21명이 체포에 동원되었다. 17명은 집 주변을 포위 · 매복하고, 다무라를 비롯한 4명은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 체포조 4명과 대치하며 총격을 가해 다무라를 처단하고, 재빨리 포위망을 벗어나 남산으로 탈출하였다. 군인과 경찰 500여 명이 남산을 포위하고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남산을 가로질러 왕십리 안장사(安藏寺)에서 승복을 빌려 변장하였다. 수유리 이모 댁으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경성 시내 효제동 73번지 이태성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이 집은 어릴 적 살던 집의 옆집으로 잘 알 뿐만 아니라 장녀 이혜수와 자매들이 협력을 아끼지 않던 곳이었다. 이 집에 숨어 은밀하게 동지들과 접촉하였다. 그러던 중 1월 21일 동지 전우진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경찰은 1월 22일 새벽 군경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이태성 집을 4중으로 포위하였다.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집들의 담을 넘나들면서 세 시간 동안을 혼자서 지붕 위와 담벼락 등에서 공격해 오는 경찰에 대항해 총격전을 벌여 16명을 사상케 하였다. 탄환이 떨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